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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말14: to act in concert

함께 행위함

by 이인미

12.3내란 사태 당일, 이를테면 '서울의 밤' 그날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되돌아본다. 민주공화국 구성원들은 여러 곳에서 여러 다른 모양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밤중에 국회 앞으로 달려가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입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시민들이 있는가 하면, 탱크(아마도 군용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시민들이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을 붙잡고 (혹은 뺨을 때리며) 너희들 이러는 거 아니야, 정신차려, 외치는 중년 여성 시민들이 있었다. 월담하는 국회의원의 다리를 올려주고 허리를 받쳐주는 중년 남성 시민들이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던 청년 시민들은 갑자기 친구들끼리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여의도로 몰려가 겹겹이 인간띠(?)를 만들어 국회의사당을 에워쌌다. 군복 입은 또래 남자 청년 시민이 겨눈 총구 앞에 조금 두려웠음에도 용감하게 나선 여자 청년 시민이 있었고, 행여 시민들이 다칠세라 가능한 한 살살 움직인 젊은 군인들, 출동 명령 받고도 인근 편의점에서 라면 먹으며 게으름 피운 젊은 군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소화기를 들어 희뿌연 소화제를 분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열심히 후진(!)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45년 만의 불법계엄, 즉 내란사태는 가장 위험했던 초기에 진압될 수 있었다. 온 나라가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내란을 막아냈다.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늙은 시민들, 민주공화국에서 나고 자란 젊은 시민들, 그들이 그날 '서울의 밤'을 밤새도록 꼬박 지켰고, 그날 이후 25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포스트 서울의 밤'을 지키고 있다. 누구, 어떤 유력한 인물, 무슨 특정 정당을 위해 나선 게 아니다. 우리들은 지금 민주주의&공화주의 '시스템' 그 자체를 지키고 있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힘으로 '시스템'을 지키고 있는 것!




시민들은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불법계엄선포 뉴스를 퍼나르며, '좋아요' 표시하며, 생각을 공유한다. 대통령의 정신건강("미친 거 아니야?!" 하면서)에 대하여 우려와 분노를 표시한다. 당일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진압(비상계엄 해제)하지 못했으면 어땠겠느냐,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로를 위로한다. 응원봉 높이 들고 앞장선 10,20,30 여성 청년 시민들을 필두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추위를 견디며 구호를 외친다. 나 또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내란 사태와 한나 아렌트>라는 매거진을 개설해 거의 매일 글을 공개함으로써, 얕으나마 내가 터득한 지식을 나누는 행위를 시작했다. '협력'하는 것이다.




이참에 우리는 '협력'을 적합하게, 아렌트의 정치이론에 힘입어, 다시 개념정의할 필요가 있다. 협력을 부정적 의미로 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내 힘이 모자라니 힘을 보태달라’로 흔히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협력은 ‘내가 힘을 낼 테니 함께 힘을 내자’는 의미에 더 가깝다. 나는 연약해서 아무것도 못하겠다(안하겠다)며 상대방에게 어떤 종류의 힘있는 행동을 바라는 것은, 협력 요청이 아니라 의존 표명이다.


아렌트가 이야기한 바 정치적 수준에서 협력의 의미는 동일한 활동을 동일한 방법과 동일한 속도와 동일한 모양으로 획일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는 ‘협력’ 즉 ‘함께함(acting together)’의 속뜻을 ‘to act in concert’로 제시하였다. 교향악단에서 연주자들이 서로 다른 악기 파트를 저마다 다르게 연주하듯 (때로는 자기 파트의 연주분량이 없어 악기를 내려놓고 쉬기도 함) 행위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협력’의 뜻이다.


헨델 "메시아" 연주중 (열심히 연주하는 사람들 곁에서 악기 내려놓고 쉬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12.3내란 사태 이후 민주공화국 시민들은 각자 할 수 있는 행위를, 각자 도달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해서 실천했고 지금도 실천하는 중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그 행위들이 바로 아렌트가 말한 의미의 협력이다. 우리는 지금 남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남들이 나와 함께 행위하리라 신뢰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목표 하나를 공유한 채, 각자가 할 수 있는 행위를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기 나름으로 전개한다. 그리하여 그날 이후, 외신기자들이 계속 놀라며 감동한다. 말 그대로 정치이론 교과서에서만 읽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개념(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현실에 현현한 걸 알아보았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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