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초보자가 감내해야 하는 시간
출판사에서 최종본을 가져간지가 한 달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가 없다. 편집 중이라는 공손한 대답만 오갈 뿐. 이제나저제나 첫 책이 언제 나올까 고대하는 초보 작가는 애가 탄다. 그런데 출판사 입장에서는 초보 작가에, 그닥 성공의 확률이 높지 않은 치과라는 소재는 중요도에서 자꾸 뒤로 순위가 밀리는 모양이다.
레지던트(수련받는 의사) 교육을 하고 있다. 치과 실력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어시스트를 하고 이론으로 배워도 실전을 한 번 하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론 교육이 끝난 레지던트에게 환자를 배정해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환자들은 실력이 확인이 되지 않은 수련 중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지가 않다. 교수에게 받고 싶어서 이런 번거로운 종합병원까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아무 케이스나 레지던트에게 배정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그가 할 수 있는 부분이고, 어쩌면 레지던트가 더 꼼꼼하게 교수보다 잘할 수 있는 부분인데도 말이다.
얼마 전 과잉치 수술을 한 아이가 실밥을 풀으러 왔다. 겁이 너무 많아서 과잉치 수술은 전신마취로 했는데 실밥을 푸는 일이 문제였다. 아이가 도와주면 1분이면 끝날 실밥 제거를 위해 전신마취를 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러 말로 달래고 얼래 보아도 아이는 요지부동이다. 아이의 논조는 명확하다. 실을 당기면서 자를텐데 실을 당기는 느낌이 "아플 것" 같단다. 맞는 말이다. 실을 당기는 느낌은 아무리 애들에게 포장해봤자 "아프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달래 보아도,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기 중인 다른 아이들을 먼저 보고 오기로 하고, 아이와 레지던트만 방에 남는다. 다른 아이들을 보고 왔더니 아이가 순순히 누워있다. 레지던트가 무슨 마술을 부렸나?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특별히 너에게만 요술 크림을 발라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 요술 크림은 딸기향이 나는 크림으로 실부분에 바르면 실 당기는 느낌이 덜 날 것이라고 했단다. 요술 크림 냄새를 맡아보고 실제로 본 아이는 마치 그것이 묘약이라도 되는 양 기대를 하며 누워있었던 것이다.
레지던트의 기지에 웃음이 빵 터진다. 요술 크림은 도포 마취 크림이다. 마취 주사를 놓기 전 주사기가 들어가는 부위의 통증을 줄여주기 전에 바르는 용도로 종종 사용한다. 그렇지. 그런 용도이니 실밥을 풀 때도 발라주면 도움이 되겠지! 나는 15년 의사생활 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아이는 요술 크림을 바르고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실제로는 실 당기는 느낌이 좀 난 것 같은데 요술 크림의 묘법일까. 5개의 실밥을 제거할 때까지 잘 도와주었다. 이렇듯 초보자의 시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도 한다. 아이가 느끼는 두려움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 아이에 대한 관심, 그리고 유연한 생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 레지던트 선생님은 분명 나보다 좋은 의사로 성장할 것이 틀림없다.
다시 초보 작가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분명 내 원고는 사랑스럽다. 부끄러운 부분도 있고 러프 하지만, 나의 경험과 생각을 오롯하게 녹였다. 전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원고를 출판사에, 독자들에게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 레지던트가 저런 기지를 가진 좋은 의사가 될 충분한 자질을 가진 친구라고 하더라도, 환자들에게 레지던트에게 진료받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최근 근대 5종 경기에서 최초로 메달을 딴 전웅태 선수가 1년 전 서장훈 씨가 진행하는 한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다. 그때 근대 5종 경기가 매우 매력적인 종목인데 국민들이 잘 몰라서 속상하다는 전웅태 선수의 말에 서장훈 씨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헤비메탈 락 밴드를 해. 예를 들어서 내 꿈은 가수인데 헤비메탈이 너무 좋아. 이 음악의 매력이 끝이 없는데 왜 사람들은 안 들어주지? 왜 인기가 없지? 그건 사람들이 결정하는거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거는 본인이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야."
내가 초보 작가로서 시간을 감내하는 것도, 레지던트가 초보 의사로서 시간을 감내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각자의 영역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내 작품을 사랑해달라고, 내 실력을 인정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저 해야 할 일은 묵묵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