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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번 써봅시다.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

한근태 작가님이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스텝으로 참여하고 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뜻의 글사세가 그 이름이다. 글사세 모임을 시작하자마자 난해한 주제가 떨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글을 왜 쓰려고 하는가" 아니 우리가 무슨 철학가 집단에 온 것도 아니고 뭐 이런 난해하고 철학적인 질문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뒤에 계속 이어지는 주제는 더 심란하다. 게다가 대부분 모인 사람들은 그냥 "글" 좀 써보고, 전문지식에 대해 책이나 한번 내볼까 싶어서 왔는데, 나에 대해 자꾸 캐묻는다. 어린 시절에 대해, 부모에 대해. 그리고 나의 상처와 추억에 대해. 책 내는 것과 이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람.




이런 거부감에 대해 누구보다 더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조금 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단호하게 말을 하자면 ‘좋은 글이란 진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이라는 호모 사피엔스는 벼룩과는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글은 자신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그게 설사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벼룩에 관한 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본질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면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오롯한 나와 만나야 한다. 그러나 책상에 며칠만 앉아 있어 보면, 나의 내면을 마주한다는 것이, 그 사실을 흥미롭게 말한다는 것이 쉽고 유쾌하기는커녕 3살짜리 양치시키기만큼이나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한 학생이 울먹이듯이 호소한다.

“당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보세요.”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에 나오는 구절이다. 또 다른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말하길, 유년 시절을 견뎌 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에서 글감을 풍부히 지니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의 유년시절은 재수 없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잘 표현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했던 유년시절도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을 모두 떠올려 보라. 만약 유년 시절이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가족에게 실제 일어난 일들에 관해 진실을 말했다가는 기다린 해골 손가락이 구름 속에서 내려와 당신을 가리키면서 천둥 치는 듯한 오싹한 목소리로 절대 발설하면 안 되는 거 알지?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도록 길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때의 약속일뿐이다. 지금은 모두 말해도 괜찮다. 그러니까 당신의 부모님과 형제, 친척, 이웃들에 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종이에 적어 보라. 그 속에 누군가에 대한 명예 훼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나중에 적절히 수정하면 된다. 앤 라모트의 말이다.




나는 엄마와의 갈등을 글에 풀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끙끙거리고 무거운 물통을 들고 온 9살 딸을 향해 엄마는 격려보다 핀잔을 건넨다. 어릴 적 기억들을 다시 글로 꺼내면 다시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으로 쏟아버리면 오히려 그 기억들은 별 것 아닌 듯 딱지가 되어 떨어진다.


과잉치 수술은 대개 7살 전후로 받게 된다. 대부분 과잉치 위치가 영구치 윗 앞니가 나오는 자리와 겹쳐져 있어서 그 영구치가 나오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이 이 나이 때는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협조도를 갖기 어렵기 때문에 10명 중 9명은 전신마취 하에 수술을 한다. 하지만 과잉치의 깊이가 깊지 않고 아이의 협조도를 기대할만한 경우에는 국소마취로 외래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그때 부모님들께 늘 말씀드리는 것이 있다. 마취를 하고 잇몸을 절개를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이가 힘들어하고 울어도 어쩔 수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주변의 근육을 단단히 뭉치면서 흉터 scar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절개만 하고 그만두게 되면 나중에 그 흉터 조직 때문에 수술이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비슷한 일이 우리 마음의 근육에도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상처 없이 살 수는 없다. 아이도 다치지 않고 자라나는 아이는 없다. 누구든 어떤 형태든 상처를 가지고 성장해간다. 하지만 그런 심리적인 상처 주변에서 근육이 단단히 뭉쳐서 흉터 조직을 만들어 버린다. 유년 시절의 상처나 성인기에 겪은 상실감이나 실망감들,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에서 비롯된 굴욕감 같은 것들이 주위의 근육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처가 다시 똑같은 자리를 공격당하지 않도록, 낯선 물질이 거기에 닿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상처를 외면할수록 상처는 주변에 더 단단한 흉터 조직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아무런 상처를 가지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한다.


과잉치도 치아다. 치아란 뼈 속에서 나오기 위해 존재한다. 나오진 못하고 뼈 속에 갇힌 치아는 그것이 과잉치든 아니든 문제를 일으킨다. 상처도 마찬가지다. 내면에 아물지 못하고 있는 상처는 그것이 어떠한 든든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내보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킨다. 전혀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 상처를 내보이는데, 이 상처를 들여다보는데 가장 좋은 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로 나를 깨우면 그 글쓰기가 나를 또 이끌어줄 것이다.


제닌 로스의 위대한 문장이 있다. “자각이란 당신 자신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아가 보다 다정한 동반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당신이 좋아하고 기꺼이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마치 당신 자신인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자각”을 “글쓰기”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글쓰기란 자신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아가 보다 다정한 동반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아다. 내가 좋아하고 기꺼이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글 한번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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