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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할 때 행복한가?

오감을 깨우는 글쓰기

행복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겨운 적이 있는가.


요즘 내가 그렇다. 이따금씩 너무 행복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명품의 신상을 사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재테크에 성공해서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다이어트에 성공해서도 아니다.



좋은 책을 만났을 때, 그 책에서 아름다운 글귀를, 속 시원한 이야기를 읽을 때 너무 행복하다. 신나는 노래를 들을 때, 그 노래가 나의 추억을 떠올려줄 때 너무 행복하다.


잔잔한 바닷가의 물결을 볼 때, 뭉게뭉게 구름이 움직이는 듯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모습을 볼 때, 쨍쨍 내리쬐는 햇빛 속에 살짝 불어오는 훈풍을 느낄 때 너무 행복하다.


초콜릿 한 조각과 라떼를 함께 머금어 달콤 쌉쌀한 맛을 동시에 혀가 느낄 때 너무 행복하다.



나는 요즘 오감으로 행복을 느낀다. 오감이 깨어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이런 행복한 감정이 들 때 글을 쓸 수 있는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내 자신이 기특해서 더 행복하다.




휴가로 여수 여행을 다녀왔다. 휴가지에서 하모(ハモ)라는 갯장어 샤브샤브 음식을 먹었다. 갯장어는 양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름 한철에만 먹을 수 있는 여수의 별미라고 한다. 글쓰기 이전의 나였다면 그냥 그렇구나. 이야. 맛있네. 거기서 그쳤을 것 같다. 그런데 이 하모라는 녀석에 대해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알아야 한다. 궁금하다.


왜 하모 인지 먼저 물어본다. 왜 갯장어라는 이름을 두고 일본어로 불리는지 궁금하다. '하모'는 '물다'라는 뜻의  일본어'하무(はむ)'에서 왔다고 한다. 갯장어는 갯벌에서 나는 장어가 아니라 '개'를 닮은 장어라는 뜻이라 한다. 그만큼 이 장어가 사람을 잘 물었기 때문에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이렇게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이 하모가 얼마나 별미였는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것을 너무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 비싼 값으로 다 사가버려서 한국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맛이 정말 그러고도 남을 맛이었다. 싱싱한 하모를 육수에 살짝 5초 정도 담그면 생선살의 칼집 부분이 꽃처럼 피어오른다. 그것이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녹는 것처럼 사라진다. 약간씩 씹히는 잔뼈가 또 묘미이다. 해풍을 맞으면서 자란 생양파에 올려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다.



얼마나 저 깊은 뻘의 하늘을 건들고 다녔으면

한 점 토막에도 검고 푸른 문신을 가졌을까.

당신은 한 점으로도 깊고 오늘 바다는 당신 때문에 더 붉지.

임호상 [하모에게] 중



임호상 작가의 "하모에게"라는 시이다. 시인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글쓰기로 그 미각을 종이 위에 옮긴다. 글쓰기의 소재가 음식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가 지은 갓김치의 소재가 되는 "갓"에 대한 시는 더 와닿는다.



해풍을 맞으며 살아온 푸른 성깔

만나기 전 소문은 무성했겠다.

처음부터 마구 덤벼들지 말라 했던가.

톡 쏘는 맛으로 달려드는

아 성질 급한 이 돌산 촌놈

괜히 시비 걸었다가 코끝이 찡하다.

한 번씩 열어보면 안다.

며칠만 달래서 보면 괜찮은 녀석이란 걸 안다.

바람도 파도 소리도 진하게 묻어 있다는 걸 안다.

임호상 [갓, 깊다] 중



글이란 이런 것이다. 지금 여수 앞에 서있지 않아도, 갓김치를 먹고 있지 않아도 시인의 글 끝에서 여수의 바다 냄새가, 갓김치의 톡 쏘는 듯 알싸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글 쓰는 사람이란 이런 것이다. 방안에 있는 고양이가 움직이는 물건을 응시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고양이는 햇살이 세다고 화내지 않고, 바닥에 구르는 공이 생쥐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않는다. 고양이처럼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응시한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을 담는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이야기의 먹잇감이 되어 내 어딘가에 비축이 된다. 하모를 먹은 내 위장도 두둑하고, 하모 배경 이야기를 들은 내 이야기보따리도 두둑해진다.




나는 불안감이 큰 사람이었다. 불안감이 인생의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불안감은 늘 조급증을 동반했다. 인생에서 나이가 들기 전에 30,40대에 무언가를 반드시 이루어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나를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인정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지위나, 재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오감을 통해 세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 행복감을 이야기보따리에 담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꺼내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의 변화와 세상의 이치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고, 그에 감사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글로 옮길 수 있어서 나눌 수 있다면 이런 무기가 또 어디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글을 쓸 수 있는 범위나 생각은 더 깊어지고 진해지지 않을까. 노년이 더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

30대의 이런 글을 썼던 내가 60대에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떤 감정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을까.

너무 기대가 되는 나의 노년이다.




고어 비달은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모든 작가와 독자들은 글을 잘 쓰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최고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그냥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니까.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대로 글을 써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다. 그리고 그 글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이 있는 이곳이 천국이다.



나는 뭐할 때 행복한가?


바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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