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신드롬
글쓰기 모임에 스텝으로 참여하고 있다. 원래 뭔가를 시작하면 대충 못하는 성미에다가 요즘 한창 미쳐있는 글쓰기다. 정신이 오롯이 집중되어 있다.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다. 다른 분들이 얘는 일 안 하나 하실까 자제하려 하지만 에너지와 관심이 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1주일 동안 각자 글을 써서 카페에 올리고 토요일 오전에 만나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그때 여러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 한 주간 많은 자료들을 찾았다. 노트에 빽빽하게 적어서 갔다. 그런데 말을 하는데 자꾸 허공에 도는 기분이다. 이상하다. 말하는 나도 집중이 안되고 듣는 사람에게도 와닿지 않는 기분이다.
글을 매우 잘 쓰는 회원분이 계시다. 어떻게 그렇게 글을 잘 썼냐. 써본 적이 있냐. 는 질문에 키워드를 잡고 그 키워드에만 집중하며 힘을 빼고 썼다고 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 흐르게 썼다 했다. 가볍게 왔는데 이 모임의 진지한 분위기를 보고 오히려 놀랐다 하셨다.
아. 그거구나..
힘 빼고 글 써보자고 독려해놓고, 내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정작 본인은 최근에 글도 쓰고 있지 않은 주제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이론을 줄줄 나열해댔다. 그러니 이런 말이 와닿을 턱이 있나. 욕심이 앞서다 보니 글쓰기의 본질을 잊었다. 글쓰기의 본질은 이론의 나열이 아니다.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고, 뇌보다는 감정에 닿는 작업이 글쓰기다.
의사들이 자주 쓰는 용어 중에 VIP 신드롬이 있다. 아는 사람이나 잘 보여야 하는 사람 등 더 진료를 신경 써서 한다고 하는데 결과는 오히려 꼬이거나 좋지 않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몇 년 전 일이다. 아이 친구 엄마가 아이의 치료를 부탁했다. 아이의 충치는 약간 애매한 상황이었다. 엑스레이를 찍어야 보다 정확하게 진단을 할 수 있었지만 아이의 협조도가 엑스레이를 찍기에 힘겨워할 것 같았다. 종합병원의 진료비도 부담을 드릴까 걱정스러웠다. 일단 3개월만 지켜보다 진행성을 보고 치료하자 했다. 그런데 그동안 걱정이 되었던 그 엄마는 다른 몇 군데 치과를 더 가보신 모양이었다. 그중 한 군데에서 신경치료를 할 정도로 썩었는데 왜 치료를 안했냐고 혼났다 했다.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텐데 나는 따지는 것으로 들렸다. 원칙대로 엑스레이도 찍고 제대로 진단하고 진료를 했으면 무리가 없었을 텐데 지나치게 배려한다고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분과는 그 뒤로 관계가 소원해졌고, 이후 나는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에 두려움이 생겼다.
의욕이 항상 좋은 결과를 부르진 않는다. 분명 잘하려고 한 일인데 힘이 들어가면 안 한 만 못하기도 한다. 2010년 4월 10일 카틴 숲 학살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을 태운 비행기가 스몰렌스크 항공기지에 착륙하려다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도 그렇다. 비행기 블랙박스를 판독한 러시아 당국은 VIP 신드롬에 따른 조종사 실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락 원인을 분석했다. 그날 기상상황이 좋지 않아 관제탑에서는 다른 공항으로 착륙을 유도했는데 대통령을 태운 조종사는 무리하게라도 착륙을 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과한 의욕이 결국 VIP를 전원 사망하게 하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삶이란 더하기는 쉽다. 그런데 빼기는 참 어렵다. 그러기에 빼기만 잘해도 잘 살 수 있는 것 같다. 글쓰기 수업에 대한 과도한 의욕은 좀 내려놓자. 뭐든지 나부터 잘하면 된다.
너나 힘 좀 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