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by 올더스 헉슬리
반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거의 없지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소란도 피우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다. 평범한 중산층 집안에, 문제를 일으킬만한 담력도 없는 평범한 딸이었다. 하지만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지금도 별 반 다르지 않지만 사춘기 이전에도 그랬고 사춘기 시절엔 더더욱 그랬다. 불만을 여기저기 티 내며 다니진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차지하고 있던 감정이었고 단 한순간도 자리를 내어 준 적 없었다. 학교나 학원에 있는 게 훨씬 좋아서 다가오는 방학이 너무 싫었다. 집 안에 있으면 그 무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현재의 삶이 후회와 불만으로 가득 차 보이는 엄마와 같이 있는 집은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안과 함께 존재했다. 무능력한 아빠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길거리로 내쫓길 것 같았다. 그 불안감은 고스란히 나를 지배했다. 손톱을 물어뜯을 만큼의 격렬한 불안은 아니었지만 안락한 삶을 간절히 원하는 원동력 정도는 되었다. 나를 공부하게 했고 움직이게 했다.
안락한 삶은 목표가 되었다. 편안한 삶에 집착했다. 편안함, 행복, 안정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상태일 테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나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불안한 청춘과 맞바꾸는 선택을 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실패를 해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시절을 노후의 안락, 평안을 위해 희생한다.
책속의 사람들에게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진정 멋진 신세계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나에겐 멋진 신세계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진보가 몰고 올 비극의 미래를 상상하며 소설을 썼겠지만 사실,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파라다이스였다. 혈연관계를 철저히 배제한 개인주의 시대는 가족으로 인해 겪게 되는 많은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차단시켰다. 가족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볼 일도, 희생할 일도 없다. 내 앞에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나면 소마와 함께 행복한 여가생활을 즐긴다. 물론 철저한 계층사회는 지금보다도 더 견고해졌다. 지금은 노력과 운이 합해지면 보이지 않는 계층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세포일 때부터 나의 신분이 정해져 있고 절대불변이다. 한데 이들에게 신분상승에 대한 의식이나 욕망이 없다면? 철저하게 세뇌되고 교육되어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게끔 설계되어 있다면 그들의 입장에선 멋진 신세계이다. 불만을 품을 일도 없고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이런 신분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그냥 죽기 전까지 사는 거다. 지배층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높은 학식을 갖추었지만 그것도 정교하게 설계된 지식이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굉장히 유아적이고 본능적이거나 약물에 의존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고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들보다는 덜 통제되고 더 자유롭고 훨씬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 그들은 자유를 빼앗긴 동물원 원숭이처럼 보일지 모른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아마 우리가 1차원적인 본능보다 정신적인 쾌락을 더 가치 있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야만인이 말하던 불행해질 권리가 팽배한 세계에 살고 있는 나는 야만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스타파 몬드의 안정된 세계에 눈을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안다. 이런 생각 자체가 굉장히 편협하고 이기적이다. 인간의 가치나 존엄성 따위를 하찮게 여긴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가치와 현실, 이상과 현재, 이론과 실재의 괴리가 크고 넓으며 얽히고설켜있다. 사는 동안은 단순하게 살고 싶다. 비록 그것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세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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