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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Oct 25. 2022

‘근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놓친 ‘사람의 자리’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그러나 모든 것을 끝낸 지금,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역겨움이 엄습해 왔다.

‘찬란히 빛나는 이성’의 대가

    인류는 빛나는 이성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의 영역을 점점 넓혀왔다. 불가능한 신화나 전설처럼 여겨지던 이야기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화되었고,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통해 만들어낸 기술로 상상과 욕망을 현실로 만든다. 그리고 인류는 자신들의 삶을 확장해주는 자신들의 이성에 감탄하며 그 이성을 후대로 이어나가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해왔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계속해서 비극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빛나는 이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을 창조해냈고, 피조물이 탄생한 순간, 그 피조물이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비극에 빠트릴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계속해서 외면한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가 그러하듯, 프랑켄슈타인이 외면하고자 했던 이성의 비극은 더욱 비참하고 잔혹한 모습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온다. 그의 주변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희생당하며 처절하고도 절망적으로.

    “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 극한의 상황에서 다시 마주한 프랑켄슈타인에게 피조물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켄슈타인』이 단순한 SF소설이 아닌 공포스러운 스릴러가 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하고, 그런 인간은 다시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이 만든다.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처럼 기술은 인간이라는 숙주를 통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며 계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며 자신의 이성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술에 잠식당하는지도 모른 채, 인류가 발명한 과학기술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과학을 숭배하고, 자신을 과신했던 프랑켄슈타인. 자신의 완벽한 이성을 증명해줄 것이라 믿었던 인간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자신이 생명을 창조했다는 사실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괴물로부터 도망친다.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한 괴물은, 자신의 이성을 증명해줄 것이라 믿었던 괴물은 자신의 동생과 약혼자를 죽이며,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이성이 창조한 것이 악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괴물을 죽이는 데에 혈안이 된다. 마침내, 북극에서 괴물과 마주한 박사는, 주인인 자신의 노예라 믿었던 프랑켄슈타인의 뒤를 따라가는, 뒤바뀐 주인과 노예의 모습을 보여준다. 최첨단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주를 이끄는 모습은 윤리적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이 한 사람을 얼마나 몰락시키는지, 그것이 만들어내는 인류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자신을 파괴하겠다는 박사의 말을 들은 괴물은 당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라 조물주여!'라고 말한다. 과연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과학기술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짓누를 때, 그것을 포기하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괴물을 '쫓아' 북극에 온 후 지쳐 쓰러진 박사와 그런 박사를 북극으로 '유인'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괴물. 어쩌면 이미 괴물과 박사처럼 인간과 과학기술 사이에도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더 큰 비극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술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에 취해 결국 인간은 예견된 비극과 마주한다. 피조물로 인한 비극에 대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자신의 이성에 도취되어 비참한 결말을 마주했던 프랑켄슈타인처럼.

   

괴물은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질 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과 마주한 그 순간, 그를 외면하고 도망친다. 탄생과 함께 존재를 부정당한 피조물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했고, 계속해서 인간 사회에 속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혐오와 비난의 시선이었다. 인간 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원했던 피조물이었지만, 인류는 그를 거부했고 냉대와 혐오 속에서 그는 괴물이 되었다.

    피조물이 가장 뛰어난 성장을 보였던 것도 자신을 탄생시킨 후 도피해버린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괴물’이라며 냉대했던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며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눈 먼 노인을 통해서였다. 그는 노인을 통해 말과 글, 그리고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인간’이 되어간다는 기쁨에 사로잡혔고, 그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 부부는 피조물의 흉측한 모습만으로 그를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며 피조물이 그들 가족에게 보냈던 사랑과 선의를 모두 짓밟아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피조물은 배신감과 분노에 가득 차 그들의 집을 불태워버리며 비로소 ‘괴물’이 된다. 피조물은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괴물은 인간의 혐오와 냉대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피조물에게 느꼈던 공포감과 불쾌함, 피조물이 느끼는 소외감과 절망은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보여준다. 괴물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표하며 그를 공격하거나 도망친다. 심지어 그를 창조한 프랑켄슈타인마저도. 하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노인만이, 그와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말하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는다. ‘나는 완벽하다’는 믿음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완벽한 정상인’들이 만드는 세계 속에 ‘비정상’의 존재는 설 곳이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도 ‘정상’이라는 개념은 비정상이 존재함으로써 정의된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허구의 순환논리 속에서 희생되는 이들은 계속해서 등장하고, 정상에서 밀려난 ‘비정상’의 존재들을 통해 새롭게 정상인이 정의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에 속한 이들은 언제나 스스로 정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비정상’의 존재들을 경계 짓는다. 하지만 ‘정상’에 속한 그 누구도 ‘비정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 피조물을 쫓아냈던 인간들도 인간사회에서 보면 낮은 신분, 혹은 천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류층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존재로서 낙인찍힌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비정상’의 낙인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비정상’의 존재를 혐오하고 비난하며 스스로 ‘정상’이라 규정짓는다.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새로운 ‘괴물’이 만들어진다.


18세기의 피조물, 그리고 21세기의 코로나

    자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과 그로 인한 비극적 운명에 놓인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을 보며 공포에 떨었을 당대의 독자들. 『프랑켄슈타인』은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성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었던 근대 사회의 질서와 사고방식에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새로운 괴물의 탄생을 두려워했던 당대의 사람들처럼, 2020년의 우리는 현대 사회의 질서에 균열을 가져온 새로운 존재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과 마주하고 있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전염병과 마주해왔지만, 2020년에 도래한 ‘코로나’에 전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기존의 질서들이 위협받기 시작했고, ‘뉴노멀’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불안감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류는 코로나를 막지 못했고, 오히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온 기술은 코로나의 전염 속도를 더욱 확장시켰다. 최근까지도 이어진 속도경쟁과 모빌리티(mobility, 이동성)경쟁은 인간의 이동 속도와 범위를 높여줌과 동시에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를 급격하게 상승시켰고,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된 정보화시대의 유산 SNS는 팬데믹에 대한 가짜뉴스도 함께 양산해내며 바이러스의 전파를 부추겼다. 발전된 건설기술을 통한 도시화와 그로 인한 높은 인구밀도는 사람들 간의 거리를 좁히며 바이러스의 전파를 도왔다. 인류가 이룩해 온 모든 질서와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드는 시점이다.

    혹자는 이와 같은 전염병이 ‘지구가 이기적인 인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드는 면역체계’라고 이야기한다. 즉,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처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전염병이라는 수단으로 인구수를 조절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세상의 냉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했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떠오르게 한다. 자신이 만든 비극이지만 그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회피하기에 바빴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에서 우리 모두에게 원인과 책임이 부여된 초유의 팬데믹 사태에서 동양인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비난을 보냈던 2020년의 현대인이 겹쳐진다. 인류는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공포와 불안 앞에서 인류는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소수자 혐오적 문화를 다시 한 번 마주했고, ‘혐오는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혐오감이 아니다. ‘정상이 무엇인가’라는 무의미한 구별짓기를 넘어서 모두가 함께 이 위기를 대처할 수 있다는 협력과 연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팬데믹과 같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혐오가 지속되는 사회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위기 극복의 시나리오를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2020년의 팬데믹 속에서, 우리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결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누군가에 대한 혐오나 책임회피,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은 새로운 사회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다. 과거에 매달리며 미래를 준비해야하는 현재를 놓치지 말고, 우리가 간과했던 인간 이성의 ‘빈 공간’을 찾아 그 균열을 봉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바라보지 못했던 ‘빈 공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사람의 자리[1]’를 찾아야 할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그렇게도 원했던, ‘이성적 인간세계’의 따뜻함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의 자리’를.


즐거움이란 비참한 내 신세를 모욕하는 비웃음일 뿐이었고,
나는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했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윤리적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가져다 줄 파국을 공포라는 감각을 통해 보여준 작품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생명창조’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를 원했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시체접합술과 자신의 과학기술을 통해 생명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지만, 그 생명의 생김새가 흉측하다는 이유로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그를 외면한다. 인간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창조물은 소외감 속에서 괴물이 되고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마침내, 북극에서 괴물과 마주한 프랑켄슈타인은 홀로 남겨지고 어느 항해사에게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근대의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와 함께 출간된 이 작품은 과학기술과 근대적 합리주의에 취해있던 대중들에게 공포를 선사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현대에서도 과학기술에 대한 경고로써 빈번히 인용되는 SF의 고전이다.

 


[1] ‘사람의 자리’라는 표현은 KAIST 전치형 교수의 저서 『사람의 자리 – 과학의 마음에 닿다』 (이음, 2019)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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