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서 Jan 04. 2021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우주가 던지는 질문

영화 《그래비티》

무선 전송 두절
시각 확인 불가

다시 말해
나, 라이언 스톤만이
STS-157의 유일한 생존자다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적 인간’

    ‘사회적 인간’은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수많은 이론들은 인간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맺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고 말하며 타인과의 연결이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설한다. 인간은 계속해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갈망하고 연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수많은 이동수단과 통신기기를 탄생시켰다. 인류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동수단과 통신기술도 함께 발달했고 21세기의 인류는 지구상의 모든 것이 연결될 수 있다는 ‘초연결사회’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코로나19’와 함께 대두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연결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완전히 대치된다.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재난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연결은 사회적 위험요소가 되었고, 새로운 연결방식과 커뮤니티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연결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안정감을 찾아온 인간은 앞으로 어떤 형태로 세상을 만들어가게 될까? 코로나19와 함께 더욱 더 커진 미래사회의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그래비티》는 이와 같은 질문에 마주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모든 연결이 단절된 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한 사람의 이야기인 《그래비티》는 과연 팬데믹의 우주에 불시착한 2020년의 우리에게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를 증명하는 공간으로 구축해왔다. 하지만 우주는 자신이 사회적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 《그래비티》를 통해 ‘우주’라는 공간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과 나약함을 아주 극명하게 표현한다.

   

죽음을 잊은 지구인, 죽음을 마주하다

    우주정거장과 우주선을 벗어나면 우주 공간에서의 인간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우주에 남아있는 사람은 오롯이 혼자가 된다. 충돌사고로 인해 우주정거장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우주를 유영하게 된 스톤 박사는 홀로 남겨진 우주에서 엄청난 불안감과 공포를 느낀다. 그 고립 속에서 스톤이 마주한 유일한 인간의 흔적은 사용기한이 끝나 폐기되어버린 인공위성들의 잔해들뿐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역동성과 생명력으로 가득 찬 지구에서의 모습과 달리 우주에서의 인간의 흔적은 모든 것이 멈추고 사멸해버린 ‘공동묘지’ 같아 보인다.

    “도시에는 죽음이 없다. 동물원에서는 모든 동물이 살아있다. 동물은 울타리나 우리 안에 가지런히 분류되고 심지어 깔끔하게 씻긴 채 들어 있다. 상점은 고기로 가득하지만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 또한, 지구에서는 산소와 환경의 영향으로 시신과 잔해들이 언젠가 산화되어버리지만, 진공상태에서의 잔해들은 어떠한 산화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 인간의 최후가 결국은 죽음이라는 단절의 형태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전염병은 죽음을 망각한 도시인에게 죽음을 상기시킨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계속해서 질병에 감염되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나 또한 감염과 사망의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사경을 헤매던 스톤 박사는 우주의 ‘공동묘지’를 목격한 후 우주에서의 고독하고 외로운 소멸을 예감한 듯 초탈한 듯 보인다. 그가 마주한 우주의 공동묘지는 팬데믹의 정중앙에 놓인 지구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중력의 무게

    우주에서의 고립과 우여곡절을 거쳐 라이언 스톤은 지구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라이언 스톤은 원시림을 연상시키는 광활한 자연 공간에서 엄청난 중력을 느끼며 깨어난다. 우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그 중력을 이기고 일어나는 라이언 스톤의 표정은 엄청난 경이로 가득 찬 듯 보인다.

    라이언 스톤이 지구로 귀환하며 불시착한 곳은, 위치를 알 수 없는 원시림과 같은 곳이다. 인류의 삶의 터전인 지구로 돌아왔으나, 모든 무전과 GPS가 고장난 스톤에게 이 곳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우주와 같다.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딘지 알 수조차 없는 곳에 착륙한 스톤 박사에게 이 원시림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우주에서와 달리 원시림에는 희망이 있다. 어쨌든 나의 고향에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는, 영원히 외로울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희망이.

    이 모든 것을 딛고 스톤 박사는 일어선다. 이전까지는 너무도 익숙해서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중력의 엄청난 무게를 느끼며 힘겹게. 극한의 환경을 마주하고 익숙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익숙했던 그 곳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나의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코로나라는 극한의 상황을 겪는 우리가 코로나 이후의 세상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코로나는 사라져도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코로나 이전과 같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코로나 없는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코로나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엄청난 강도로 감각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일상적인 중력의 무게로 인해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던 스톤 박사처럼.

    코로나라는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는 ‘팬데믹 종료 선언’이라는 지구로의 귀한을 기다리고 있다. 우주의 끝에서 성공적으로 귀환한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게 될 중력의 무게는 과연 무엇일까? 너무도 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사회적 연결에 대한 기억일까? 아니면 안전을 위한 시스템과 사회적 비용의 문제일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코로나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에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중력의 무게를 계속해서 실감하며 그 무게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마스크 너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낯설어졌고, 코로나 이후를 기약했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팬데믹이라는 우주로부터의 귀환, 그리고 그 이후

    2020년의 우리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사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전염병이 인간의 삶 전체를 덮쳐버렸고,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이 사태의 출구를 찾기 위해 모두가 고군분투하지만 끝은 요원해보인다. 지금까지 현대 사회를 지탱해왔던 많은 질서와 규칙들이 무력화되었고 많은 이들은 코로나19 이후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뉴노멀’이라는 미래를 고민하고 답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코로나19 라는 거대한 혼란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해보인다. 앞으로 전진하고 싶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도 두려운 이 시대에 우리는 또 다른 ‘숭고’의 경험과 마주하고 있다.

    거대한 우주에 홀로 남겨졌던 스톤 박사가 ‘숭고’한 우주에서의 경험을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딛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듯, 코로나19라는 거대한 혼란 속의 우리도 지금까지의 사회적 모순을 딛고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 현대사회가 가져가야 할 많은 교훈들을 얻었다. 코로나19의 전염경로는 경제적 불평등이 건강의 불평등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증명했고, 기존의 경제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기본소득’은 ‘재난지원금’이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양한 분야에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팬데믹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그것의 개선방안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야 할 때다. 사회적 모순과 균열, 문제점들을 차치하고 속도와 발전을 위해 무작정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관습들을 뒤로하고, 현대사회가 미뤄왔던 질문들의 답을 찾아야 한다. 조금 느리더라도, 잠시 멈춰야 할지라도 답을 찾아야 한다. 더 거대하고 강력한 재난이 찾아 왔을 때도 그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보기에 예상되는 결과는 두 가지다
멀쩡한 상태로 내려가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거나
앞으로 10분 안에 불타 죽거나

어느 쪽이든 밑져야 본전이다!
어떻게 되든 엄청난 여행일 거다.
난 준비됐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13년 작 「그래비티」는 우주에서의 임무 수행 과정 중 동료 맷 코왈스키를 잃고 홀로 남겨진 라이언 스톤의 지구 귀환 여정을 다룬 작품이다. CG를 통해 환상적인 영상과 상상 속의 우주의 모습을 그려내기보다, 사실적인 우주의 모습을 재현해내고자 음향효과를 최소화하는 등의 연출기법을 사용하여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이동진 평론가)는 평가와 함께 SF영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그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감독상을 포함한 7개부문을 수상했다. 우주비행사인 스톤 박사의 영웅주의적 모험서사에 치중하기보다, 자녀를 잃은 부모이자 우주에 고립된 인간으로써의 나약함이라는 인간적인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우주가 주는 시각적 체험과 주인공의 서사를 잘 연결시킨 수작이다.

[1]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노승영 역), 2020, 『시간과 물에 대하여』, 북하우스, p283.


이전 01화 SF, 그리고 뉴노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