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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Jul 01. 2024

환영받지 못한 길

- 선택에 대해


 커다란 종이 위에 뾰족한 세모 하나가 그려져 있다.  

  "이것이 남산이다잉."

 아빠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 세모 밑에 '南山'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 쭉 뻗은 선을 그어 한강을 그렸다. 한강 위아래로 여러 갈래 길이 나뉘었다.  

  "이 짝이 종로고 여기서 옆으로 가믄 동대문이고, 이 짝이 강남이고……. 한강이 서울을 반으로 쪼개부렀어. 어디서든 길 잃어불믄 제일 높은 건물로 올라가라잉. 그라믄 다 찾을 수 있응게."

 아빠는 대단한 기술이라도 전수한 듯 뿌듯한 표정이다. 그런 아빠 앞에 대학 입학을 앞둔 열아홉 살의 뽀송한 내가 있다.  


 '선택'이라는 단어를 맞닥뜨릴 때마다 큰 종이 위에 서울 지도를 그리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빠는 바야흐로 30여 년 전, 서울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내 눈앞에 서울을 펼쳤다. 아빠가 그린 서울은 빛바랜 기억을 닮아 없는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빠가 그리는 서울을 열심히 두 눈에 담았다. 길을 잃으면 경찰서가 아니라, 가장 높은 건물로 올라가라는 엉뚱한 조언도 되새겨 들었다. 그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의 서울행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쓴 환영받지 못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남아있다. 유머러스한데, 뒤끝이 쌉싸름하다.


 나는 두 군데의 대학에 합격했었다. 한 곳은 집과 가까워 통학할 수 있었고 4년 장학금이 보장된 대학이었고, 한 곳은 기차로 3시간 거리인 서울에 있는 대학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품 안에서 뜨신 집밥을 먹으며 학비 부담 없이 대학에 다니길 원했다. 그런데 나는 서울행을 고집했다. 말 잘 듣던 막내딸의 반란이었다. 처절한 대치 상황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고성과 눈물이 난무했고, 결국 나는 부모님의 달갑지 않은 허락을 받아냈다.

  "니가 선택한 길잉께, 책임은 다 니가 져라잉."

 아주 무서운 말이었다. 그럼에도 어렵게 받아낸 허락이 회수될까 두려워 나는 얼른 대답했다.  

  "뭐든 제가 알아서 열심히 할게요."

 정말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고, 생활비는 아르바이트해서 벌면 될 일이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전장에 나가는 장수 못지않게 비장했다. 당시 열아홉 살 아이의 가슴에 어떤 뜨거운 것이 담겼길래 그런 용기가 났을까?


 나의 선택에는 '뚜렷한 이유'와 '불명확한 예감'이 영향을 미쳤다. 설명하기 쉬운 건 아무래도 뚜렷한 이유 쪽이다. 고등학생 때 나는 도서관에 가서 월간 과학 전문 잡지인 '과학동아'를 보는 게 낙이었다. 과학동아에는 알 수 없는 얘기와 알고 싶은 얘기들이 가득했다. 그 미로 같은 이야기 속을 헤매는 시간이 참 좋았다. 진로에 대한 내적동기가 비 온 뒤 죽순처럼 자라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과학도가 될 거야.'

 죽순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단단한 대나무가 되어있었다. 내가 선택한 서울에 있는 대학은 내가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 대나무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어린 내가 꾼 푸르고 단단한 꿈이었다.  


 불명확한 예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그건 말 그대로 정말 불명확한 것이었다.  

  '지금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논리적으로 이 예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사실 내가 선택한 서울행이 후회를 동반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부모님은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만 하겠다며 매몰차게 돌아서 버렸다. 그러니 독립과 동시에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했다.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그다지 용기 있는 인간이 아닌 나는, 앞날이 두려웠다. 그런데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후회한다.'도 아니고 '후회할 것 같다.'는 흐리멍덩한 예감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이 흐리멍덩한 예감이 끝없이 재생됐다. 나는 이 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맞이한 서울은 아빠가 그린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빠의 그림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복잡한 정도? 이곳에도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었다. 다만 내가 쉬어갈 곳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차이라면 차이었다. 대학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위해 달리고, 일이 끝나면 내 몫의 공부를 하기 위해 또다시 달렸다. 늘 바빠 여유가 없었고, 자주 지쳐있었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위해, 누구도 알지 못한 고군분투가 있었다. 환영받지 못한 선택에 따른 혹독한 대가랄까? 당시 나는 친한 친구에게도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열어 보일 수 있을 만큼 내가 단단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응당한 책임이라 여겼었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말한 대로 내 책임을 다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생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꼭 대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시절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네가 다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았냐?'는 지탄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모든 일을 나 몰라라 하고 싶다. 그렇게 무책임하고 해맑게 학교만 왔다 갔다 하고 싶다. 킁킁거리며 온갖 재밌는 것들을 찾아다녀야지!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아직 그 시간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 모양이다.  


 이쯤 됐으면 나는 그때의 선택으로 인해 '뚜렷한 이유'와 '불명확한 예감' 따위는 따라가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맞다. 모두가 반대하는 길은 가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도 나는 선택의 순간에 나의 결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비록 한 때의 꿈이고 흐리멍덩한 예감에 의한 결정일지라도 말이다.  


 선택의 순간, 나는 생각한다.

  '괜찮다. 어떤 걸 선택해도, 어떻게든 된다.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하자.'

 이런 믿음 때문에 나는 내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내 생각 말이다. 그러니 누구에게 잘 묻지도 않는 편이고 그저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그래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셈이다. 내가 나로 사는 게 어렵다니……. 조물주는 인간의 머릿속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열아홉, 그 시절의 선택이 나를 바꾸었다는 말은 못 하겠다. 다만 얻은 것과 잃은 것이 극명했던 강렬한 경험은 나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내 안에 남았다. 고단했던 대학 생활에도 내내 장대비만 쏟아지진 않았고, 내가 가진 좋은 부분 중 몇 조각은 그 시절에 만들어졌다. 나는 분명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  


 그러니 선택의 순간, 짜장을 먹어도 짬뽕을 먹어도 괜찮을 노릇이다. 심사숙고해서 외쳤다면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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