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한국 오가며 친구 사귀기
미국 친구한테 편지를 받았다.
밈과 트위트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손수 쓴 편지는 흔치 않다. 모두가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에서는 카톡이 모든 편지와 이메일을 대체해버렸다. 미국은 좀 더 여유가 있다. 생일카드는 물론이고 무슨 특별한 날만 되면 카드를 써서 축하해주는 문화이다. 그러나 이렇게 긴 장문의 편지를 받기는 참 오랜만이다.
나와 그 전 주에 나눈 대화 이후 주중에 내가 생각 나더라며...
그 전 주.
난 남편 때문에 너무 속상했었었다. 엄마 모임에서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는 나한테 누가 "How are you?" 하고 물어봤다. 별로 다정스러울 것도 없고, 그냥 물어보는 말인데, 그 말에 눈물이 갑자기 봇물 같이 쏟아졌었다. 울며 엄마들에게 속사정을 토로했더랬다. 멈추지 않는 남편의 분노, 자기 감정이 한번 상하면 두고두고 괴롭히는 모습, 계속 비난하는 말들, 교묘히 사실을 왜곡하는 억지부리는 말들.
미국 엄마들은 내 이야기를 귀기울여줬다. 그 시간이 내 카운셀링 세션이 되어버렸다.
그냥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고 내 얘기를 원인분석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었다. 미국인들이기에 괜히 체면차릴 필요도 없었다. 남편이랑 어떤 사회관계로 연결되어있는 걸 따지지 않아도 되어 좋다. 한국 남자들은 인격이 저 정도인가보다,하며 편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상관없다. 한국남자들이 좀 그런건 사실이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하소연하고 싶고, 그래서 했고, 나를 어떻게 볼지, 남편을 어떻게 볼지, 한국인을 어떻게 볼지, 한국 남자들을 어떻게 볼지 상관없었다. 우선 이 엄마들이 너무 괜찮은 엄마들이었다. 남을 흉보거나 할 정도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그 듣는 품에 안겨서 다 열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써주고 그 다음주에 편지를 줄 정도로 마음을 열어줄 줄은 몰랐다.
사람은 오픈 하는 만큼 상대방도 오픈한다. 자기를 열어주는 것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신뢰하고 내 속마음을 꺼내놓고 대화하고 나를 투명하게 내보일때 상대방도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에 반응한다. 우정의 시작이다.
미국인 친구들도 마찬가지. 미국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우정을 맺을 수 있다. 언어가 된다면 아주 유리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통한다. 배려심, 진심, 슬픔, 기쁨. 사람의 희노애락은 보편적이다.
난 어릴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까지 살면서 한 동네에서 4년 산것이 가장 오래 살았던 기록이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도 미국과 한국을 드나들었다. 결혼하고도 이사를 열번 이상 했으니 한 곳에 오래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이렇게 자주 이사를 다니고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 안에 놓이게 되니 관계를 맺기 위해 오래 기다릴 수가 없다. 친구를 사귐에 있어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가능한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난지 얼마 안되는 사람에게도 내 속마음을 열고 오픈하는 것은 어쩌면 자주 이사를 했기에 발달된 모습일 수도 있다. 또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 지혜일 수도 있다.
젊어서는 몰랐다. 나를 열어 보여줘야 친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젊을 때는 항상 주변에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몇 사람과 깊이 관계를 맺고 사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던 것 같다.
또 젊었을 때는 날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미국에서 다녔는데, 그 때는 내 안에 열등감이 많았다. 영어를 못한다는 열등감, 백인친구들 보면 꿀리는 인종적 열등감. 그래서 미국 친구들과는 별로 사귐이 없었다.
근데 결혼해서 애들 낳고 살다보니, 나이가 들다보니, 내 안에 열등감이 옅어져서 그런지, 영어를 더 잘하게 되어서 그런지, 애들 키우다 보니 미국엄마들과 친해지는 게 쉬워졌다. 또 아내로서, 애들의 엄마로서 보편적인 체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그런것 같다.
실제로 미국엄마들 모이면 거의 대부분 애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 출산 이야기 하는게 한국이랑 똑같다.
한국 남자들은 모이면 축구 이야기, 군대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한다고 하지 않는가. 여자들은 모이면 출산 이야기와 임신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서로를 관통하는 공통주제이므로 말이 잘 통한다.
그 미국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수채화로 직접 그림을 그린 예쁜 수제카드에 감사의 글을 썼다. 진심을 담았다. 이 나이가 되어 펜팔처럼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니. 순수했던 학창 시절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