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당한 코리안 Oct 26. 2022

가지 많은 나무엔 바람 잘 날 없다고

내 미국 절친 이야기

나보다 10살 위인 메이는 내게 아주 특별한 친구이다. 한국에서는 열 살 차이가 나는 사람과는 별로 친해질 기회도 없고, 친하다고 해도, 친구라고 하지 않고, 선배 또는 친한 언니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친하면 그냥 친구라고 하는데 나이를 그닥 따지지 않는 문화에다 존댓말 없는 언어가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자영농장을 운영하는 메이와는 처음에는 애들 홈스쿨을 통해, 그리고 정기적인 친구모임을 통해 친해졌다. 가장 결정적으로 우리가 친자매처럼 친해진 건 그 집에서 약 3주간 남편 없이 아이 네명 데리고 홈스테이 할 때,  집안일도 같이 하고 애들 홈스쿨도 같이 하면서 공동육아 공동교육을 하면서였다. 그때 별의 별 일들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의지하고 서로 믿어주고... 어느정도로 신뢰가 쌓였냐면,  무언가로 감정이 상해도 "메이의 (훌륭한) 인품을 생각할 때 그건 그런 의도로 말한게 아닌게 분명해" 라고 생각이 들었고 곧 얘기하다보면 오해였음을 알게 되고 풀게 될 수 있던 것이다. 


메이도 내가 다른 친구보다 더 속 깊은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친구라고 했다. 다른 미국 친구보다 더 서로 이해해주는 관계라고 했다. 그 말이 참 따뜻했다. 홈스테이 이후 다시 한국에 왔을 때도 몇 년간 꾸준히 서로 이메일을 쓰며 안부를 전했다. 


이번에 테네시로 안식년을 가기로 한 데에는 메이 영향이 컸다. 미국에 가족 하나 없는 나에게 메이는 언니 같았고 친정 부모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새로운 사람 만나는데에 제약이 큰 이 시기에 메이은 내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마음의 보금자리가 될 것 같았다. 


내가 테네시 안식년에 있는 동안 우린 참 많이 만났다. 같이 애들 캠프도 참석하고, 공원에 놀러도 가고, 바베큐 같이 하고. 


뻑하면 그 집으로 전화해서 애들 데리고 놀러갔다. 거의 30분이 걸리는 시골길을 지나자면 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때로 송아지 때가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도 있다. 언덕 너머 띄엄띄엄 집들이 서있는 풍경은 독일 라인강을 따라 기차여행 할 때 봤던 그런 목가적인 정겨운 풍경이다. 


목장에서 곧바로 나오는 원유의 맛이 그리울 때, 밀을 집에서 즉석에서 갈아 막 구운 통밀빵의 고소한 맛이 그리워질 때 시도때도 없이 찾았다. 특별한 날에든, 슬픈 날이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올해 메이의 친한 친구가 코로나로 죽었을 때 꽃다발 들고 위로해 주려고. 서로 아이들 생일 때, 부모님 등이 모이는 가족모임에도 가고. 남편과 싸우면 가서 울며 하소연 하고. 메이 부부는 우리 부부에게 부부 카운셀링도 해주었다. 남편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기모습을 본다며 메이 남편은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했고 우리 남편과의 매주 점심약속을 잡았다. 


가면 애들은 같이 숙제하고 같이 달걀 줍고 소 젖 짜고, 어릴 땐 나무에 달린 그네 타고 놀고 물 받아서 물놀이도 하고, 한번은 수채화도 같이 그리고 그랬다.  메이는 바쁘게 움직이는 대로 난 내 할일 하고, 메이가 좀 여유가 생기면 같이 앉아서 차도 마시고 저녁 먹고 올 때도 있고...  15에이커 되는 탁 트인 땅에 가면 대지가 참 푸근하다. 애들은 자연에 가면 그렇게 창의적이 될수가 없다. 핸드폰은 던져두고 밖에 무슨 놀이를 그렇게 찾아 노는지. 떠날 땐 직접 만든 체다치즈 한덩이도 챙겨주곤 했다. 



제작년 우리가 안식년을 갈지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쯤, 졸지에 할머니가 되었다며 나한테 이메일을 보냈던 메이. 그것도 세 명의 손주가 한꺼번에 생겨버렸다고. 


20대 중반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결혼을 했는데, 둘다 아이가 딸린 이혼녀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결혼과 동시에 4-5살 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손주들을 두게 되면서 자기의 기대와는 상관 없이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내가 함께 있었던 안식년 기간 동안 아들들 관련해서 특히 일이 참 많았다. 50대 중반인 메이는  장성한 아들이 둘 있고 십대 소녀딸이 둘이 있다. 나도 애가 네명이 있지만, 메이를 보면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게 이걸 말하는가 싶다. 


첫째는 이름이 대니얼. 2년제 대학을 마치고 군대에 들어갔다. 아라비아어를 전공한 그는 군대에서 아라비아어 자격증도 따며 자기 실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다. 부모로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얘가 그러다가 혹시 이라크나 이란 같은 위험한 전장으로 배치를 받으면 어쩌나였다. 


그러나 좀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들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꼬이기 시작했다. 신체의 안전이 아닌 정신적인 안전, 자아의 정체성 자체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나치주의에 빠져있는 롬메이트를 만나면서 백인우월주의에 점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모든 선하다고 믿어왔던 것들,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고  열등감과 증오로 가득찬 이상한 철학과 망상에 빠져든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독일쪽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고 유태인 느낌이 나는 이름, 대니얼에서 자기가 고른 에릭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 난 그렇게 자식을 키우지 않았는데... 

- 아니, 실제로 독인인 피가 흘러?

- 아닐 걸. 우린 정말 다 섞여 있어서 잘 모르는데 독일인 쪽 피는 없을거야. 

- 왜. 요즘 DNA 검사들도 많이 나와있잖아. 그런거 안해봤어?

- 난 그런거 안해봤거든. 아마 대니얼, 아니 에릭은 했을거야. 근데 별 소리 안하는 거 보니까 독일 피 없는걸로 나온 듯.  


그는 휴가를 나올 때마다 부모와 많은 마찰을 빚었다. 심지어 부모가 자기를 왜 이렇게 키웠냐며 자기 가치관 뿐 아니라 부모의 가치관까지도 완전히 거부하기 시작한 첫 아들. 자신의 모든 실패와 이루지 못한 꿈을 그 부모에게 원망하였다. 그 첫 아들 때문에 부모는 인생 전체에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첫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던걸까. 아들이 어렸을 때 우리 부부가 너무 싸워서 그런걸까. 우리가 가르치는 것만큼 제대로 된 본보기가 되지 않았던 걸까. 군대로 간다고 했을 때 반대했어야만 하는 걸까. 홈스쿨을 해서 얘가 너무 세상의 여러 풍조와 영향에서 과보호를 받았던 것일까. 


아들이 이렇게 나올 때 엄마와 아빠는 다르게 반응하는 것 같다. 아빠는 단호하게 이 아이와의 관계를 끝내겠다고까지 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까지 했고 엄마는 그래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편과 자식 사이에 중재하며 끝까지 혈육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군대에서 다른 여러 일을 겪고 결국 군대를 나오기에 이르렀다. 완전 독일태생 아리안족 금발여인을 만나 결혼했는데, 부모에게는 거의 통보수준이었다. 그 여자는 첫 결혼에서 얻은 두 딸이 있는 이혼녀였다. 사진을 보니 금발의 미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뚱뚱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 참 웃기지. 독일인을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금발이어야되고 뚱뚱하면 안된다고 하더니, 이 며느리는 결혼한지 일년 만에 완전 살찐거 봐. 


며느리와의 관계도 소원했다. 작년 말 이 둘은 아이를 낳았는데 메이네 부부는 손주를 보러 병원에 갈 것인가 말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아들과의 관계가 시어져있었다. 그리고 보통 첫아들이 자식을 낳으면 주려고 간직했던 소중한 퀼트이불. 대니얼이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로부터 받았던 퀼트이불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기 낳으면 베넷저고리 만들어주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퀼트이불을 만들어주는 전통이 있다. 대니얼이 자식 낳으면 줘야지 하고 20년 넘게 갖고 있으면서 이번에 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증조할머니한테 물려받은 그것 말고도 자기가 직접 만든 퀼트 이불 하나도 있었는데 그것도 줄까 망설이고 있었다. 


- 너무 잘 만들었다. 가서 꼭 줘. 두 개 다.  

- 근데 그 애가 필요 없다고 거부할까봐 겁나. 

- 그럴리 없을거야.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아이 출산을 축하해주는 걸 고마워할꺼야. 


결국 그 두 부부는 4시간 거리를 운전하여 첫 손주 출산을 축하하러 갔다. 그리고 역시 혈육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아이를 소중히 안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이제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첫째와 비슷한 시기에 둘째도 결혼했다. 그리고 형과 비슷한 시기에, 정확히 말하면 3개월 후에, 아이도 낳았다. 이 둘째 아들과 며느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둘째 아들 속앓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 아들은 자기 생각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인 22살때 결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싼 학비 들여 파일럿학교를 보내놨더니 두학기를 남겨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이 아들은 우리가 홈스테이 할 때 고등학생이었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아서 블로깅도 하고 과학자인 우리 남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똘똘한 아이였다. 오랜 시간 보이스카우트 활동으로 야외활동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 우리 가족한테 토끼 사냥한 것을 가져와 가죽 벗기는 것도 구경시켜주고, 들풀에 나가 어떤 풀이 약초인지 일일이 설명해주기도 했다. 이런 둘째 아들이 기특해 우리 가족도 이 둘째 아들 학비에 보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대학생활 자체에 회의가 든 아들은 휴학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오는 과정 중에 자기를 돌봐준 가정의 딸과 사귀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다. 


여기도 이혼녀로 엄마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중이었다. 5살짜리 아들이 딸려 있었다. 아... 메이 정말 힘들었겠다 싶은 대목이다. 


메이는 솔직히 말해 아들 둘이 이혼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 완전히 반갑지만은 않았다고 나한테 고백했는데, 결국 자식 인생은 자식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특징에 따라 포기도 빠르고 마음 상한 것도 금방 정리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 결국은 그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니까.


너무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이지만... 적용이 힘든 말.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그런 것들중 하나가 자식일 아닐까. 


그나마 둘째는 첫째처럼 삐딱하게 나가지는 않고 건실하게 살아서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며느리도 착해서 둘이 서로 도와가며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빨리 자식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자식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지혜이리라. 다만 마치치 못한 대학교육이 아쉬울 뿐이다.


두 딸은 아직 14살, 12살로 고만고만한 나이이고, 엄마를 잘 도와 집안일도 잘 돕는다. 장성한 아들들은 자기 뜻대로 안된다 하더라도 이 딸들은 아직 내 품의 자식 같아 마음의 위로가 되었을 터.아직도 소망스러운 두 딸들에게는 애들에게 라틴어도 가르치고 문학을 가르치고 전직 수학선생님인 실력으로 수학도 놓치지 않도록 아이들을 야심차게 키워내고 있다. 그러면서 농장일을 가르치고 요리도 가르치면서, 이 아이들이 컸을 때 농장사업을 물려 받아 계속할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근데 이 딸들에게도 큰 시련이 왔다. 


14살 카야는 아침잠이 없는 아이다. 그래서 가족 중에 아침에 소젖 짜는 역할을 맡았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양동이 두개를 들고 외양간으로 가서 약 20-30분이면 두 마리의 젖소 젖을 다 짜고 여물을 주고 물을 채우고 돌아온다. 


그럼 나중에 엄마나 아빠가 젖을 필터해서 우유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 속에 빠져들어 독서의 세계를 즐긴다. 


우리 첫째 아들과 동갑이 카야는 둘이 같은 홈스쿨 그룹에서 공부한다. 이 그룹에서 함께 준비하는 것 중에 하나가 <모의재판> 이라는 건데, 실제 있었던 사건을 갖고 검사측과 변호사측으로 편을 나눠 증거자료와 그동안 배웠던 로직을 적용하여 법정공방을 해보는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이다. 


발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카야. 홈스쿨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연습해 온 카야는 또 약간의 쇼맨쉽도 있어서 큰 성량과  약간의 드라마틱한 인토네이션과 제스처를 섞어가며 외워온 대본을 발표를 참 잘하기도 한다. 그래서 모두 만장일치로 비중이 높은 변호사 역할을 카야에게 밀어주었다.


4월 말에 모든 홈스쿨 학기가 끝났고 약 2주 후에 법정에서 만날 것이었다. 


5월 5일부터 평상시 있던 두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카야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엄마 속을 썩이곤 했다. 물을 많이 마시게 하고 쉬게 하고, 책에서 눈 좀 떼어 쉬게 하고. 그러다보면 또 낫기도 하고. 


그런데 두통의 강도가 세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토까지 하네. 가까운 친구들끼리 문자하는 단톡방에 카야 엄마가 문자를 보냈다.

 

-카야가 많이 아프네.  


stomach virus 인가? 


그 다음날 또 카야 엄마한테 문자가 왔다. 


- 아이가 계속 한시간마다 3-5번씩 토하고 있네. 자정부터 4시까지는 쭉 자긴 했는데, 지금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거든. 아이가 이제 좀 회복의 기미가 보이면 좋을텐데.


엄마들이 

- 애가 탈수되겠다! 물이라도 잘 먹어야 할텐데!


미국에서는 병원을 한국처럼 잘 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감기가 걸려도 곧장 동네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는데, 미국에서는 왠만한 병은 병원에 안가고 몇일 지켜보고 가는 편이다. 우선은 병원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다. 병원에 가려면 미리 appoint 예약을 잡아야 하고 예약 잡고 가서도 오래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응급으로 가야 할 때 결국엔 응급실을 이용하게 되는데, 또 얼마나 비싼지! 보험이 된다 해도 한번 가면 기본 co-pay 자가부담금이 $100은 기본이고 $500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신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의료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점도 있고, 의사들이 불필요하게 과잉진료를 하고 과잉처방을 한다고 의심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병원에 가라고 말하는 등의 제안도 조심해야 한다. 원래 카야가 어릴 때부터 두통이 심했다는 말에, 또 그런가보다... 하면서 "병원에 가봐"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번 주말 지내고 나면 월요일 모의 재판. 주말만 견디면 된다. 그럼 또 나아지겠지.  주말만 견디고 월요일 모의재판 끝나고 병원에 가자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말 동안 하루 종일 끙끙대다 결국엔 일어날 수도 없어 침대로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는 딸의 모습을 보더니 엄마 아빠도 이건 좀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홈스쿨 그룹에 전체문서를 보낸다.


- 카야 두통이 낫질 않아서 아무래도 오늘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음. 내일 모의 법정은 못가게 될 확률이 많음.


결국 카야는 일년 동안 준비하고 기대했던 모의재판을 참석하지 못했다. 너무 아쉬워서 어쩌니 하는 문자에 답장 


- 애가 너무 아파서 실망을 느끼지도 못하는 지경이야. 상태가 너무 나빠. 


그리고 병원에 가서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다음은 문자 전문. 


5-15 일요일 

- 카야에 대해 다들 걱정해줘서 고마워. 오늘 MRI 촬영했고 입원됐어. 일주일은 입원해 있을 것 같아 (미국에서는 하루 입원하는 것도 큰 일이다. 우선 비용이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입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심각하다는 뜻이다.) 우리 아이 일은 우리가 더 알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근데 우선 우리가 아는 것은 카야의 뇌에 종양일 수도 있어보이는 덩어리가 발견되었다는 거야. 약 3cm 지름. 

내일 오전에 응급 뇌수술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는 상태야. 


5-16 월요일

수술일정이 내일로 잡혔음. 7:30 am

양성종양 같아 보이고 완전한 제거가 가능하다는데, 약간 어려울 수도 있대.

The mass is thought to be benign and compete removal is possible but tricky.


5월 화요일

- 수술에 들어갔어. 수술은 4-8시간 걸린대. 계속 알려줄께. . 

- 10:00 AM 간호사와 정신과 팀에서 알려준 리포트 : 수술 (특히 절개)은 9:45 분에 시작했어. 다 잘 됐대. 너무 고마워. 너희 한명 한명이 너무 소중해. The nurse on the neuro team sent the first update: The procedure and in particular the incision began at 945 AM. All is well. We feel so much support. We love you and are incrediblyk thankful for each of you.

- 11:00 AM 그 종양이 부분적으로 제거 되어서 조직검사부로 들어갔음. Some pieces have been removed and sent to pathology. 

- 12:30 AM 너무 좋은 소식이야. 수술은 끝났고 그 종양은 종양이 아닌 피덩어리로 밝혀졌어. 암도 아니고 종양도 아니고! 다시 재발하지 않을거래 (완전히 확실하진 않지만 거의 확률적으로). 오늘 중환자실 지나면 2달 동안 집에서 회복하고 나면 건강해질 거래! 2주면 괜찮아 질거라네. 올해 여름에는 수영 못하고 3개월은 특히 호수는 안된대! 


그렇게 카야는 수술을 하고 회복하기 시작했다. 곧 지나 더 알게된 사실은,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해 뇌척수의 압력이 높다는 것이었다. 

약을 먹고 시술을 하면서 뇌척수의 압력을 조절하기로 했다. 


엄청난 일들을 일년 사이에 겪은 이 가정. 어려움을 겪으면 자식이 얼마나 더 소중한지 알게 된다고, 평상시에 않던 딸자랑도 한다.


- 우리 카야가 너무 잘하고 있어. 웃는 얼굴 보니 모두들 안도하고. 아이가 어찌나 의젓하고 용감한지! 성숙한 여인처럼! 사실 이번 주 병원에 입원해있는 주는 마치 모녀만 따로 휴가를 나온것 같지 뭐야. 

카야가 제일 무서워 하는 건 샤워하면서 수술자국이 아파질까봐 하는 부분이야. 오늘은 혼자 샤워도 잘 하고 나는 머리 감는 것만 도와줬어. 


- 카야가 샤워하면서 노래하는 소리를 오랫만에 들었지 뭐야. 오늘은 요리까지 좀 하더라니. 여러번 웃는 모습을 봤음. 


틴에이저의 딸아이의 웃는 모습에 기뻐하는게, 마치 아장 아장 아기가 처음 발을 떼었을 때 기뻐하며 자랑하는 엄마의 모습 같다. 


우리가 안식년이 끝나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날,  메이네 가족과 함께 했다. 마침 그날 2차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카야를 위해 꽃을 들고 갔다. 


미국친구의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바로 옆에서 모든 과정을 함께 하고 함께 걱정하고 기도하고 했던 것은 큰 특혜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강의 문제 앞에서 모두 속수무책이지만, 함께 걱정하고 기도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한다. 이 코로나 기간 동안 혹독한 태풍을 맞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옆에 있음으로 감사했다. 다만 같이 있음으로. 나중에 기념이 될 것이므로. 

이전 01화 코로나 시국에 미국 일년 살고 오면서 얻은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