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은 교수다.
가족 입장, 아니, 와이프 입장에서 볼 때 교수라서 제일 좋은 특혜는 7년 만에 돌아오는 "안식년"이다.
안식년, 혹은 연구년이라 불리는 이 기간, 교수 가족들은 외국에서 일년 살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기본적인 월급이 나온다. 현지생활비가 따로 나오는 주재원 만큼은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 어린 자녀가 있다면 영어를 익히게 하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서 학교도 다녀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라고 난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5년 전이었다면. 심지어 3년 전에라도.
그런데 2년 반 전 코로나가 터졌다. 많은 주변 교수가족이 안식년을 취소하거나 미루었다.
안식년은 해외에 대한 로망이 강했던 예전 만큼 한국인에게 강하게 어필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미국에서 혐아시아인, 인종차별이 불거진다는 보도가 판을 칠 때는 더더욱 말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벌써 안식년을 안가거는 가정이 많이 늘은 추세였다. 안식년 나가서 1년 동안 쓰는 돈이 1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년 동안만 살고 올 집 장만하는 것도 힘들고 차도 딱 일년만 살 것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하다. 이런 저런 어려움을 감안해서라도 아이 영어를 생각하면 또 그나마 가볼만 한데, 애들 연령에 따라 애가 너무 어려도 안되고 또 너무 커도 가성비가 안좋다. 아이가 중학생이라도 되면 학교공부 이유로 안가기도 한다. 귀국 이후에 학교공부 따라잡기가 너무 버겁다고 한다. 국어... 사회 ㄷㄷㄷㄷ
우리 첫째가 올해 중학생 2학년이다. 그러므로 안식년을 안가는 것도 고려해볼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애가 넷이다. 초등학교 1학년의 우리 막내를 생각할 때 안식년은 큰 기회였다. 그리고 해외 여행하기 황금기이기도 했다. 첫째가 더 크기 전에, 더 크면 더 이상 가족이랑 안 다니려고 할 것이기에, 그리고 막내는 이제 아기 티를 벗고 여행을 해도 기억을 할만한 나이가 되었기에, 지금이 딱 좋았다.
2020년 코로나가 전세계를 휩쓸고, 코로나가 수년 동안 지속될 거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를 떨칠 때쯤, 우리 가족은 안식년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 목적지는 미국.
사실 미국은 우리에게 새로운 나라는 아니었다. 내 인생의 젊은 시절을 살았던 곳이다. 결혼 전 7년, 결혼 후 8년 플러스 알파. 우리 아이들이 다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 미국은 우리의 또 다른 모국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21년 7월 미국행 비행기에 우리 가족 여섯이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일년을 살고 왔다. 집값, 월세가 너무 비싸서 집 구하기 단계에서부터 포기하려고 했던 안식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잘 살고 온거 같다. 일년을 마치 칠년 처럼 살고 왔다. 다시는 가지 않아도 후회 안 남으리만큼. 이게 마지막 기회다 싶은 생각으로,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미국에서만의 경험을 얻는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난 안식년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 가족은?
미국 가서 가자 마자 코로나 걸려서 거의 죽다 살아났고, 부부 관계는 바닥을 치고 이혼의 위기를 몇번 심각하게 맞았다. 뭔가 미국에서 시도해보고자 별렀던 일들은 (주식 포함) 모조리 망해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우리 가족의 첫 애완견도 키웠는데 사고로 저세상을 보내고 더욱 우울해졌다. "안식년" 이라는 미명과는 달리 "안식"은 별로 없었고, 한편 애들 교육 때문에 많이 매달렸고, 매일 집에서 해먹여야 해서 음식하느라, 애들 라이드 주느라 너무 바쁘게 살다왔다. 여행은 후회 남지 않으리만큼 잘 했지만 그만큼 통장도 가벼워졌다.
근데 이야기거리가 생겨났다. 이야기거리가 넘쳐난다. 블로그를 시작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가 매일마다 생겼다. 나와 가족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일년 동안 우리 가족이 살면서 섞인 이웃들, 여행하면서 스쳐가듯 만난 이들의 인생이야기들이 너무 재밌어서 그들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일년 동안 얻은 것은 결국 경험이다. 내 안에 담겨진 여러 이야기들. 인간경험. 직접경험과 그리고 간접경험을 통한 인생의 배움.
직접경험도 몇 갑절을 하고 온 것 같지만, 간접경험도 넘치게 하고 왔다고 말할 수 있는게, 우린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구경하고 왔다. 가장 값진 것은 미국 현지인들과의 관계 맺음과 우정이었다. 그들의 삶 속으로 나를 들어오도록 해줬다. 그 삶을 열여보여줬다. 미국인들, 그렇게 자기 얘기를 잘 한다.
내가 외국인이기에, 혈연이나 지연으로 묶인 것이 없으니까 더 자유롭게 속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나? 우선 언어소통이 원활히 되면, 미국사람들은 오픈마인드이다. 자기네들 인생 안으로 참 잘도 초대를 해준다.
미국판 인간극장. 나는 객석의 손님이 되어 그들의 이야기 속에 펼쳐지는 인간극장을 많이 보고 왔다.
사람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건 사람들 인생 이야기들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미국인들도 있고 한국인들도 있다. 다들 하나같이 어쩜 인생들이 험난하고 굴곡이 있는지. 그냥 꽃길만 가는 인생 없다. 한국에서 바라보는 미국인의 생활, 다들 풍요롭고 쉽게 살 것 같지만, 할리우드의 그런 꿈같은 생활을 할 것 같지만, 그런 인생 없다. 다들 험난하고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삶이 나를 위로했고 격려했고 감화시켰고 고무시켰고, 때론 경각심을 주었다. 때론 이질감이 들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동질감이었다. 결국 인생의 본질은 같다고 느꼈다. 피부색깔도 다르고 그들의 사고방식도 많은 부분 한국과는 다르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있고 우리네 인생도 같은 질감으로 만들어져있다. 동질감.
그 후 1년 후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우리의 그동안의 일년의 삶은 우리 친구들, 실제 얼굴을 부비고 만났던 이들, 미국인들, 미국을 진짜 미국답게 만드는 그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