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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eer Mar 22. 2020

이 구역의 패션왕

본격 엄마 칭찬하기 세 번째 

  우리 가족이 옷을 입는 방식은 각자의 성격만큼이나 다르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성격은 너무나도 다른데 옷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다르다. 얼굴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옷은 각양각색으로 입은 모습들이 재미가 있다. 

  

  우선 나로 말하자면 좀 깔끔하게 입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다. 기본템을 좋아하고 옷장을 열어보면 무채색의 향연이다. 흰색, 회색, 그리고 검은색. 뭘 입을지 모를 때 항상 답은 검은색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검은색 옷을 입으면 깔끔하면서 세련된 느낌이 들어서 좋다. 가장 많이 사는 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검은색 슬랙스이다. 검은색 슬랙스는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아도 어떤 건 나를 예쁘게 보이게 만들고, 어떤 건 나를 굉장히 부풀어 보이게 만들어서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을 찾기가 어렵다. 아직도 나만의 검은색 슬랙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택배는 꾸준히 우리 집 문을 두들기지만 성공하는 일이 드물어 아직 서랍 속에는 검정 슬랙스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아빠를 살펴보자면 아빠는 '마누라 뜻대로' 타입이다. 아빠는 집 밖의 누군가가 자신의 패션에 대해 논하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엄마의 의견에는 크게 동요하는 타입이다. 엄마는 아빠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아빠와 외출할지 여부를 정하곤 한다. 아빠가 요상하게 입기만 하면 "그렇게 입으면 같이 안 나갈 거야."라고 귀여운 불호령을 내리시기 때문에 아빠는 늘 외출 전에 엄마 앞에 가서 자신의 패션을 확인받으신다. 엄마가 "진짜 이상해."라고 말하시기만 하면 아빠는 평소답지 않게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신다. 그러고는 "이거는 괜찮지?" 소심하게 물으신다. 엄마가 끄덕거리며 허가를 내리시면 둘은 함께 외출 준비를 하신다. 평소 아빠는 엄마 말을 순순히 말을 잘 듣는 타입은 아니다. 엄마가 말하면 구시렁거리시거나 반대로 행동하시기 일쑤인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패션 쪽으로는 굉장히 순순히 말을 따르신다. 또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재미있어서 지켜보며 웃곤 한다. 


   다음 오빠를 살펴보면 오빠는 '꽂히는 대로' 타입이다. 오빠는 주로 한 번에 한 가지에 꽂히는 타입이다. 축구에 꽂혔을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팀의 유니폼을 종류대로 다 사서 입고 다녔다. 여름에는 반팔 유니폼 티셔츠를, 봄과 가일에는 팀을 스폰해주는 브랜드의 져지를, 겨울에는 그 팀의 패딩을 사 입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그것들을 사들이는 모습이 즐거워 보여 잔소리를 다시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오빠는 요즘은 신발에 꽂혀있다. 농구에 흠뻑 빠지더니 농구화를 사 신기 시작했다. 슬램덩크에 나오는 빨간색과 검은색이 조합된 농구화부터 시작하더니 스트리트 브랜드와 콜라보한 신발들을 사들였다. 입이 벌어질 만한 금액들의 신발들을 사기도 하고 희소한 신발을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한다. 그렇게 산 신발들은 되팔면 오히려 돈이 된다나? 그런데 얼떨결에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내가 되었다. 오빠는 발이 다른 남자들에 비해 작은 편이다. 그래서 오빠가 새 신발을 샀다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사이즈가 작아 안 맞는 게 있으면 나에게 주곤 했다. 오빠의 플렉스(flex: 돈을 쓰며 과시할 때 쓰는 신조어)의 수혜자가 된 나는 새 신을 신고 폴짝거리곤 했는데 얼마 전엔 오빠가 자신의 인생템을 찾았다며 그 신발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선물 중단 선언이다. 아. 이렇게 나의 공짜 득템은 끝이 나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난 오빠가 또 다른 아이템에 꽂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구역의 패션왕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엄마다. 엄마는 자신만의 패션 세계가 아주 뚜렷하신 분이다. 화려한 듯하면서 수수하고 눈에 띄는 듯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내 친구들도 엄마를 만나면 '와 어머니 패션 짱이시다.' 이런 말을 가끔씩 하곤 한다. 나도 엄마의 패션에는 엄마 동년배들과 뭔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 패션의 지론을 말하자면, 첫 번째론 '내가 못 입는 옷은 없다.'이다. 엄마는 패션에 대해서는 뭔지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으시다. 내가 안 입는 옷이 있어서 '엄마, 이거 입을래?'이렇게 물어보면 엄마는 '그래, 난 다 입는다. 줘봐' 이렇게 말하신다. 어떤 옷을 드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는 어떤 옷이든 소화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근데 좀 기묘한 것이,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엄마한테 드린 옷을 엄마가 입으면 내가 생각했던 그 옷의 단점은 사라져 버리고 자연스럽게 엄마의 옷이 되어있다. 그래서 이상해서 다시 내가 뺏어서 입어보면 다시 이상한 옷이다. 왜인지 씁쓸하지만 그녀의 소화력이 남다르게 때문이겠지. 엄마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동생들의 너무 미모가 뛰어나서 자신이 승부할 방법은 패션밖에 없다고 생각했단다. '너네는 예쁘지만 나는 어떤 옷이든지 다 소화해'라는 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자부심이랬다. 


  두 번째 지론은 '나한테 안 맞으면 고쳐 입는다'라는 것이다. 엄마는 독특하고 튀는 옷들을 좋아하시긴 하지만 그 옷이 불편하면 절대 입지 않으신다. 집안일 때문에 소매가 짧아야 하고 자신의 체형을 커버하기 위해 티셔츠는 엉덩이를 덮는 기장이어야 한다. 꼭 옷에 주머니는 필수이다. 그리고 옷에 포인트가 없으면 심심하다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선집을 애용하신다. 수선집을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이 방문하시며 옷들을 자기 스타일에 맞게 고쳐 입으신다. 주머니가 없는 옷은 팔을 잘라 주머니를 만들어 붙이고 밋밋한 옷에는 포인트가 될만한 것을 붙여 새로운 옷으로 탄생시킨다. 그래서 옷장을 보면 누구에게도 없는 엄마만의 옷으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난 엄마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만 같아 속상한 마음이 밀려온다. 지금처럼 직업이 다양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면 특유의 패션 감각으로 패션계에서 한 자리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편집장 같은 엄마의 모습을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아직 엄마처럼 아무 옷이나 입어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과하게 입고 외출했거나 내 마음에 쏙 들게 옷을 입고 나오지 못한 날이면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집에서 내가 입은 차림새를 여러 번 살펴보고 나오는 편이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야 패션은 자신감이야. 거지처럼 입어도 지만 당당하면 끝이야."라고 하시며 웃으신다. 아. 문제는 자신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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