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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eer Mar 13. 2020

성실함의 무게에 대하여

본격 아빠 칭찬하는 글

  아빠, 우리 아빠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번에 장점을 말하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실 때 늘 얄밉게 한마디를 덧붙일 때가 많다. 좋은 일은 다하고도 한 마디 얄미운 말 때문에 점수를 잘 깎아먹는 사람이다. 집안일에 손을 까딱하지 않는다. 그래서 왠지 엄마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 분하다. 돈을 참 좋아하신다. 그래서 내가 주변에 앉아있으면 늘 돈타령을 한다. 나뿐만 아니라 오빠가 있을 때도 그렇다.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우리가 다 크고 나니까 왠지 찌르면 돈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렇지만 아빠는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성실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하시다. 어릴 때는 성실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덕목인 줄 몰랐다. 그냥 왠지 거창한 능력을 못 가진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수상을 못 받았지만 개근상을 받은 아이처럼 보인달까. 하지만 내가 크고 직장인이 되어보니 성실한 것은 모든 것의 토대이고 근본인 것 같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아빠는 성실왕이다. 30년 이상 동안 회사에 지각 한번 하지 않고 딱 정해진 시간에 일하러 나간다. 일하러 가서도 중간에 반차를 쓴다던가 별 일이 없으면 월차를 쓰는 일도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 나는 일하러 가서도 반차를 쓸 수 있는 조건만 되면 쓰고 싶어서 미쳐버린다. 반나절이라도 놀고 싶어서,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에 여유롭게 보내고 싶어서 반차 쓰는 걸 참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30년 동안 하지 않다니. 게으른 나로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빠의 그런 성실함은 퇴직하고 나서도 쭉 이어졌다. 아빠는 퇴직하고 나서 생긴 시간의 공백을 견디지 못했다. 한두 달을 쉬었을까. 자기는 더 이상 쉬지 못하겠다며 이런 삶은 안 되겠다며 직장을 구하러 나가셨다. 하지만 나이 60에 구할 수 있는 직장이 많으랴. 아빠는 공인중개사 공부도 해보고 이전 직장 근처도 살펴보셨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보험설계사 일을 선택하셨다. 엄마와 나는 '이제는 좀 쉬시지 왜 일을 하러 나갈까' 하며 그의 성실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보험 일이 힘드니까 조만간 일을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가 그만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조금 즐기길 바라면서.


  하지만 아빠는 지금 거의 1년째 보험회사에 꾸준히 다니신다. 물론 그가 꾸준히 다니는데 우리 가족이 크게 기여하긴 했다. 그 일 년 사이에 엄마와 나는 여러 종류의 보험에 들어야 했고, 그러고 나서도 엄마랑 내가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라치면 '걔 보험 들라고 해'라는 권유를 듣곤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험회사가 생존해나가는 방식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코로나 정국에도 아침 8시부터 나가서 저녁 7시에 들어오신다.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이 시국에 보험을 권하는 사람을 누가 반길까. 10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단호하고 냉정한 말들을 들어야 할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나가서 영업직 사원을 만났을 때, 카드 회사 직원을 만났을 때, 02로 시작되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들을 대하듯이 사람들은 아빠를 그렇게 대하지 않을까. 나쁜 말은 하지 않아도 그와의 대화 끝엔 어떤 속임수가 있을까 봐 대화를 끊어버리고 마는.


  그런 성실함으로 우리를 키우는 그 오랜 시간을 직장에서 버텨냈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이 한 사람을 그렇게도 지독히 성실하게 만들었나 보다. '내가 노력하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애절함이 그 시대 어른들을 가만히 쉬도록 두지 않았나 싶어 마음이 짠하다. 그래, 가족을 먹여 살린 그 성실함이 앞에 말한 단점들을 다 상쇄시키는 '치트키'인 것 같다. 앞에 했던 욕은 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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