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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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ree Moirai, or the Triumph of death, Flemish tapestry, c. 1520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___명예 죽음 운명
마라톤 세계 신기록 보유자 켈빈 킵툼이 지난 2월 차 사고로 사망했다. 24세 케냐인 켈빈은 장거리 인생을 살지 못한 최고의 마라토너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의 운명은 그가 태어날 때 정해졌을까. 신은 서서히 그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봤다. 태양 아래 서는 날이 적을 운명이기에 세계 신기록이라는 빛나는 영광을 대신 가져간 걸 거야. 영원할 영광을 짧은 생과 맞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희망이 넘치는 존재이기에 선택보다는 모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지 않을까. 트로이 전쟁의 히어로 아킬레스는 자신의 앞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에 영원할 영광과 짧은 생을 놓고 저울질하게 된다.
정복한 땅에서 상금으로 얻은 여자를 빼앗아간 아가멤논에 반항해 전투에서 보이콧하고 혼자 분을 삭이는 아킬레스. 인간과 여신의 아들 아킬레스는 가장 빠르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힘센 그야말로 무적의 용사였다. 그가 부재한 전투에서 트로이 군은 기세등등했고 그리스 군은 사면초과를 치른다. 너 없이도 우리는 싸울 수 있다 했던 아가멤논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고 아군의 함선에 불이 붙기 시작해도 그는 꿈쩍하지 않는다. 이쯤 해서 독자는 그가 품은 분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어떤 종류의 분노가 이리도 무모하고 파괴적인지. 어떤 종류의 오만이 이리도 치명적인지.
아킬레스는 아가멤논을 향한 개인적인 분노 외에 자신의 짧은 운명에 분노하고 불가사의한 우주적 불공평에 절망했다. 운명이야말로 한번 정해지면 인간뿐 아니라 신들도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이었기에.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운명의 신으로 세명의 자매가 있었다. 클로토(실 잣는 자), 라케시스(실 감는 자), 아트로포스(실 끊는 자)는 인간의 운명을 실패에 감긴 실처럼 다루었다. 이들의 역할은 모든 존재가 우주의 법칙에 의해 할당된 운명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는 인간적 고뇌가 깊었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알려준 두 갈래의 운명 앞에 놓인 것이다. 싸우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장수하거나 싸우다 전사해 영원한 명예를 누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단 전투에 합류하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결국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가 결정한 운명은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향한 분노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페트로클러스를 그 대신 전투에 보내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하고 이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되었다. 이제 그는 죽음이라는 임박한 운명을 온몸으로 껴안을 준비가 되었다. 페트로클러스를 죽인 헥터에 복수하기 위해 전투에 깜짝 귀환하고 예상대로 헥터를 죽인다. 제우스도 어쩌지 못한 헥터의 운명이었다. 헥터는 트로이 성 밖에 남아 아킬레스를 기다렸다. 용기만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던 운명은 그를 배신했고 하데스의 세계로 직행했다.
아킬레스의 분노와 오만을 다시 무너뜨린 건 목숨 걸고 아들의 시신을 거두러 온 헥터의 아버지 프라이엄의 부성애였다. 이제는 다시 못 뵐 고향에 계신 아버지 필리어스와 죽은 페트로클러스를 생각하며 아킬레스는 프라이엄 왕과 함께 운다. 애도 후에는 함께 식사하기를 권한다. 헥터의 장례절차까지 고려해 준다. 결국 사랑이라는 힘이 운명을 좌우하는 우주의 법칙을 지배했는가.
우주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지구적 시점에서는 불공평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주의 밥상은 공평하게 차려진 적이 없다. 사회적 지위, 성공, 수명 같은 것을 보더라도 누구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다. 어떠한 보상도 고통의 단지로부터 나올 뿐이고 모든 성공은 우리를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깝게 데려다 놓는다. 명예와 목숨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아킬레스의 운명을 사는 셈이다. 아킬레스는 단명한다. 우리 모두는 거역할 수 없는 죽음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어떤 인간도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슬픔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이 있기에 인간 세상과 이야기가 존재한다. 다가올 죽음을 알기에 우리는 죽을 만큼 용기를 내고 죽도록 사랑을 한다. 불멸하는 신들에겐 사랑의 희소성도 목숨 바쳐 싸울 일도 없으리라.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죽을 것이다. 그들을 영원히 잃을 것이다. 슬프고 화가 날 것이다. 울 것이다. 기도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일리아드는 이 불가해한 진실을 다시 알려준다.
___신과 인간
헤르메스가 나를 불어에서 떼어내 영어에 안주하게 한 일이 있다. 그가 보낸 북풍의 신 보리아스가 시험 당일 바람을 일으켜 불문과에 낙방하고 다음 해 흑석동 수험장에는 행운의 신 티케가 찾아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에서 찍기를 도왔다. 헤르메스는 다시 나를 영어권 호주에 떨궈 놓았고 뒤늦게야 불어라는 로망을 불어넣는다. 내 인생을 가지고 논 짓궂은 헤르메스의 계략이다. 엉뚱한 상상 같지만 대학입시 과정을 겪으며 본능적으로 느꼈던 사실이다. 붙고도 남을 불문과에 미끄러지고 다음 해 상향지원이라던 영어교육과에 안착했다. 아쉽게도, 붙은 아이들보다 떨어진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같은 교실에서 일 년 동안 함께 고생했는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됐다는 건 신의 변덕이나 편애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미스터리였다.
인간 세상에 신이 개입하는 스토리는 일리아드를 특별하게 하는 요소이다. 하나의 신이 아닌 여러 올림푸스 신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마음대로 변장할 수 있고 마법의 안개로 시야를 가리기도 하고 어떤 거리도 놀라운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인간의 다툼과 전쟁을 단순한 오락으로 취급하고 영화감상하듯 전쟁의 스릴과 스펙터클을 즐긴다. 그들도 인간처럼 좋아하는 캐릭터, 취향, 욕망이 있고 변덕스럽거나 무심하다가도 엄청나게 잔인해질 수 있다. 신들은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조종하고 맘만 먹으면 도시와 인간을 파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인간이 죽으면 애도하기도 하지만 사랑이나 슬픔이 아닌 분노가 그들의 지배적인 감정이었다. 신의 사랑은 예정된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할 수 없었지만 신의 분노는 인간의 대량 학살을 초래할 수 있었다.
트로이의 운명을 두고 신들이 그리스와 트로이, 두 편으로 나뉘어 티격태격 우왕좌왕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가관이다. 트로이와 트로이인을 사랑하고도 줏대 없이 구는 제우스를 가운데 두고 그리스 편에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헤르메스, 헤파이스터스가, 트로이 편에 아폴로, 아프로다이티, 아레스, 아르테미스, 레토, 잔터스가 합세해 전투장의 영웅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희일비한다. 신들은 경쟁하고 다투고 명예, 권력, 성공을 강렬히 욕망했다. 우연과 운명에 의해 그들의 파워가 제한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운명의 신은 가장 강력한 신 제우스의 가장 강력한 소원도 무시할 수 있었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아들, 사피돈의 임박한 죽음을 막지 못했다. 하늘의 신 제우스조차도 밤의 여신을 두려워했고 때론 아내이자 누이인 헤라와 협상하고 타협해야 했다. 신들도 인간들만큼이나 약점 있고 상처받는 존재였다. 그들은 불멸할 뿐 완벽하지 않았다.
신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인간의 행동이 오로지 신의 조종에 의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여러 요인이 관여하기 마련이다. 신은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미 고려하고 있던 것 중 하나를 넌지시 찔러줄 뿐이다. 마지막 결정은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 트로이 편에 선 여신 아프로다이티와 전쟁의 신 아레스를 공격해 감히 상처를 입힌 다이어미디스라는 젊은 그리스 전사가 나온다. 제우스가 우리에게 등을 돌렸으니 철수밖에 답이 없다는 대장 아가멤논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도 그였다. 기원전 12세기에 권위를 넘어 신에 저항한 젊음이라니. 이건 뭐랄까 백그라운드 빵빵한 아킬레스급이다. 이때 독자는 카타르시스(κάθαρσις, katharsis)라는 고대 그리스어를 체감한다. 반항할지언정 비겁하지 말 걸 그랬지. 무모할지언정 물어라도 볼 걸 그랬지. 살면서 작게나마 이룬 게 있다면 내 의지가 만든 결과라고 믿어 보자.
훅 찌르는 신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면 바람신의 물리적인 개입인지 우연한 자연 현상인지 생각해 보았나. 호머의 일리아드에서는 신들이 의도적으로 접근해 일을 처리하고 그것을 인간이 인지하기도 한다.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 호주에 온 첫 해 사막을 가로질러 어쩌다 에어즈 록까지 등반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힘겹게 정상에 올라 바위 위를 걷는데 바람이 휘익 불었다. 바람이 불어 모자가 들뜨면 얼른 손으로 누르거나 날아가다 떨어지면 가서 주워올 텐데 그때 날아간 모자는 날개가 달린 듯 저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게 묘한 기분이었다. 여행 내내 썼던 분신 같은 모자가 순식간에 나를 떠났다. 그 순간 뒤에서 한 목소리가 외쳤다. “너 모자 여기에 남겼다!” 바람과 사막의 신이 합세한 손짓 같았다. 내가 호주에 남으리라는. 헤르메스가 그들을 보내온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