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프랑크푸르트 산책

Auf Wiedersehen!(다시 만나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짐한 것들이 있었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을 찾으러 다니느라 시간을 흘러 보내지 말 것과 유명한 관광명소도 조금은 남겨 두자는 것이었다. 다음에 또다시 훌쩍 떠나올 변명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L 항공사의 말도 안 되는 횡포에 자칫하면 비행기도 타지 못할 뻔했는데 어쨌든 새로운 비행기를 출발 5시간 전에 예약할 수 있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급히 티켓을 바꾸는 바람에  모두 뚝뚝 떨어져 모르는 사람들 틈에 앉아 10시간 넘게 끼여 왔지만 그래도 결국은 독일땅을 밟았음에 감사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인 독일어를 배우면서

"난 언젠가는 꼭 독일에 가 볼 거야!" 했는데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 설레고 두근거렸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내리자마자 공항 가득

노란색 L 항공사의 카운터가 보였다. 굉장히 카운터가 많았다. 이렇게 큰 회사의 사무소가 한국에는 없다니.....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겠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항공사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싱가포르, 독일, 필리핀으로 통화를 해야 했고 담당자와 직접 연결도 안 되고 오로지 메일로만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노란색 표지판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파파고만 믿고 떠났는데 그들이 하는 말을 파파고도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있었다.

난생처음 듣는 언어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된 것 같았다. 그나마 영어는 익숙하니 영어로 소통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영어로 듣고 독일어로 대답을 해주니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파파고를 돌려가면서 한 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sixst라는 렌터카 업체를 찾아갔다.


" 우리가 예약한 차를 받으려고 해."

" 응, 너네 짐은 몇 개야?"

"  사람 4명에 짐 5개야"

"그래? 그럼 이 차는 좀 작아. 이 차는 어때?"


4명의 식구와 짐을 가지고 다니려면 기차보다는 차를 렌트해야겠다 싶어서 몇 달 전에 그들과 상담하고 큰 차를 빌려두었는데 막상 가니까

추가금액 120만 원을 지불하고  더 큰 차를 가져가라고 하니 난감했다.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차를 받고 숙소를 찾아가니 저녁이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허기를 채워야 해서 근처 REWE라는 마트를 찾았다.  독일엔 REWE, ALDI, LIDL, Edeka 등의 마트가 있는데 그중에서 REWE 가 가장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식구들이  영어식 발음으로 '리위'라고 할 때마다 고등학교 때 짧게 배운 독일어 실력으로 '레베' 또는 '레브'라고 알려주었다.

사실 기억나는 단어는  구텐 모르겐, 구텐 탁,

아우프 비더젠, 쇼콜라데..... 뭐 이 정도인데

식구들은 나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듯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서 독일 하늘을 보니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여러 나라를 여행했었지만 독일은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와보는구나 싶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정확한 이름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문호 괴테가 청춘시절을 보냈던

도시이다.

독일에서 보기 드물게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 가기 위해 환승을 많이 하는

도시이다.

한국은 무더웠던 9월 중순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는 바람이 불고 꽤 추웠다.


어업의 요지가 되면서 중세에는 제국 자유도시가 되고 신성로마제국 시대에는 황제의 선거와 대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점점 도시는 커져서 지금은 금융기관들과 유럽중앙은행도 이곳에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해서 프랑스 남쪽으로 내려가서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남부, 중부를 지나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들어가는 계획을 짰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렌터카를 이용했기 때문에

간혹 트램이나 지하철은 탔지만 기차는 타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장 처음 찾아간 곳은 프랑크 푸르트

중앙역.

머리색, 피부색이 다른 정말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도착하는 그곳.

상징적으로 그냥 들러본 곳인데 흥분과 설렘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난 아직 젊은 건가? 기차를 보니 왜 이리 신나지?


기차역엔 늘 커다란 시계가 있다.

이곳 역시 시계가 있지만 모두 전화기로 시간을

본다. 봐주는 이 없이 그러나 아주 먼 옛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중앙역의 시계는

우리를 내려다본다.

시침과 분침이 사이좋게 전진한다.

사람들도 그렇게 움직인다.

현실이 싫어서 떠나기도 하고 아쉬워서 되돌아

오기도 하고  그리워서 다시 떠나기도 하고..

역 주변에 하루종일 노숙자가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맛이 궁금했던 3천 원짜리 프리즐은

쫀득하고 짭조름해서 가격에 비해 괜찮았다.

중앙역 안에는 서점도 있고 맛있는 식당도

있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화장실이 보이질

않는다. 경찰에게 물으니 수도고장이랜다.

새삼 어딜 가든 화장실은 풍족한 우리나라가

고맙다. 약간의 애국심이 생겼다.

중앙역을 기준으로 하루 이틀 걸으면

볼 수 있는 게 제법 많아서  시도해 보았다.



중앙역에서 조금 가면 괴테의 생가가 있다,

괴테가 26세까지 이곳에서 감수성 풍부한 시절을 보내면서 '베르테르의 슬픔'을 4주 만에 완성했다.

괴테하우스는 정갈한 정원을 지나 생가로 들어가는데 한 층 씩 올라갈 때마다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굉장한 독서광이었고 괴테는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거라고 짐작된다.

티켓을 끊고 들어가지만 누구도 티켓검사를

하는 이 가 없다. 사뿐사뿐 내 집 마당을 들어가듯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괴테는 이 정원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왜 그렇게 슬픈 소설을 쓴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유럽은 창문개수와 세금이 비례했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괴테의 생가는 창이

무지 많은 걸 보니 아주 부자였음을 알겠다.^^

300미터 정도 되는 괴테거리에는 명품샵이 줄지어 있었다.  괴테하우스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아서 쇼핑하러 왔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관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은  바르셀로나대성당 과는 또 다른 웅장함과 위엄이 있다.

전형적인 붉은색의 고딕 건축물이었다.

마침 미사 중이었는데 영상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했다. 언어가 다르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다 느껴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을 거행했던 장소이다,



뢰머광장은 알트슈타트 즉,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의 중심이다. 축제나 집회가 많이 열리는 곳이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마켓도 열린다.

뢰머광장을 중심으로 중요한 곳들이 사방에

있어서 조금만 걸으면 다 볼 수 있다.

뢰머광장엔 3동의 옛 시청사건물로 사용됐던

귀족의 저택이 있는데 가운데 건물이 뢰머이다.



광장 가운데는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 동상이 있다. 한 손에는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세 채의 귀족의 저택을 시청사로 개조했고 가운데 건축물의 이름을 따서 뢰머광장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뢰머광장의 랜드마크인 알 테 니콜라이 교회는 14세기까지 왕실예배당이었고

하얀색과 빨간색으로 건축되어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다웠다.

가장 번화한 곳이 하우프트바헤를 중심으로 한

차일거리이다.



마인강 위를 가로지르는 아이젤너 다리는

연인들이 매달아 놓은 형형색색의 자물쇠가

아름답다.

마인강을 가운데 두고 남쪽 박물관지구와

북쪽 뢰머광장이 있는 구시가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다리이다.

물빛은 그다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회색 물빛이 화려한 자물쇠들과 대조를 이루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유히 흐르는 마인강 위에 내가 서있음이

실감 나지 않았고 독일에 가겠다는 여고시절의

꿈이 이루어져서 감격스러웠다.



단연코 내 기억에 남는 건 재래시장인

클라인 마크트할레였다.

수산물과 처음 보는 식재료가 한가득이고

소시지할머니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슈바인 학센 맛집에서 식사를 했다.

독일의 여러 도시를 갈 때마다 그 도시의 슈바인

학센을 맛보았으나 결론은 나의 입맛엔 맞지

않았다. ㅠㅠ



조금 더 걷다 보면 파울교회가 보인다.

독일헌법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독일 최초로 자유선거를 통해

구성된 국회가 열린 곳이고,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교의 중심교회로 사용되었다.

마인강변의 에프  드라이쾨닉 슈키르헤는

이름처럼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가지 색의

성단이 특징이다.



마인강 남쪽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모여 있다.

그러나 식구들이 원치 않아서 다음 기회로

남겨 두었다.


프랑크푸르트엔 델리카트슨 ( 햄, 소시지, 치즈를 파는 곳)과 콘디토라이(제과점)가 아주 많았다. 특히 그로제 보켄하이머 거리는

'먹자골목'이어서 업무지구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아주 근사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많았다.

독일남부의 도시들과는 대조를 이루는 도시였다.


프랑크 푸르트의 인상은 드라이하지만은 않았다.

마인강 위의 이젤너 다리에 서면 누구든

그러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는 이미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듯했고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괴테가 작사하고 베르너가 작곡한

들장미를 옛 기억으로 불러보았다.


자 아인 크나베 아인 뢰슬라인 슈텐

뢰슬라인 아우프 데어 하이덴

봐 소 융 운트 모르겐쉔......


이렇게 독일에서의  첫 마그네틱을 손에 쥐었다.

# 프랑크푸르트여행

# 유럽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