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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날 Mar 14. 2024

달리는 이유는 없다



하프마라톤 대회를 나간 이후에 여느 때처럼 일주일에 10킬로미터씩 달리고 있다. 대회를 마치고 자기효능감에 젖은 기분으로 ‘다음에는 풀코스를 뛰어볼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다시 생각해보니 시기상조인 것 같다. 아직은 하프마라톤만 뛰어도 며칠 동안 족저근막염에 시달리는 런린이(러닝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시간이 없어서, 날씨가 좋지 않아서 등⋯ 달리지 않을 이유는 많다. 그러나 러너들은 오늘도 달리기를 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를 붙들고 자신만의 길 위에서 달리기를 이어간다.


소설가 김영하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수백 가지 이유가 아니라 되어야만 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든다고.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될 수 없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단 한 가지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쏘다니던 시절에는 사회생활에 이리저리 치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나 역시 과거에는 길 위에서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기를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면 소년은 어느새 교복을 벗어던지고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달리기도 하다 보면 조금씩 먼 거리에 익숙해지면서 몸은 어느새 달리기에 맞게 재조직된다.


삶의 여정이 장거리 달리기와 같다고 하면 너무 과한 비유일까. 그러나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달리기를 하면서 느낀 솔직한 심정이다.


달리기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큰일은 여러 날의 작은 일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거라는 사실을(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심지어 석사 논문을 코피를 쏟으며 완성하면서도 깨닫지 못한 사실이다. 참고로 내 인생은 대학원을 다니던 서른 초반까지 벼락치기의 나날이었다. 이쯤 되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는 이루고자 하는 일을 장거리 달리기처럼 해보고자 한다(몸이 덜 고생하기 위해). 예전에는 거대한 벽 앞에 서면 아득한 꼭대기만 올려다보면서 행동하는 것을 주저했다면, 이제는 벽 앞에서 계단을 한발 한발 쌓아나갈 궁리를 해볼 것이다. 아니면 구덩이를 파거나, 벽을 조금씩 허물거나, 벽에 숨겨진 문을 찾는 것도 괜찮겠다.


돌이켜보면 단순히 재밌어서 시작한 달리기로 많은 것을 얻었다. 놀랄 만큼 좋아진 체력을 얻었고, 보기 좋고 튼튼한 다리를 얻었다. 서울과 부산을 세 번 왕복하는 거리를 달리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까지 얻었다.


2000킬로미터를 달리면서 느낀 점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감상에 젖거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나불대면 미래의 나에게 이불킥을 선사할 위험이 있다(감정은 사라지지만 글은 영원히 남기에). 2000킬로미터는 작은 거리는 아니지만, 마냥 크다고도 할 수 없는 거리이기 때문이다(이런, 겸손함까지 얻었잖아).


내가 바라는 것은 목표한 거리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는 몸과 마음. 그것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달리기를 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를 붙들고 러닝화의 끈을 단단히 묶는다. 길 위에서 언제나 묵묵히 발을 굴리는 나 자신을 꿈꾼다.




이미지 출처: Mayo 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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