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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날 Mar 06. 2024

하프마라톤 대회 후기



하프마라톤 대회를 나가기 위해 장거리 달리기에 맞는 몸으로 부지런히 길들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달리던 것을 두 번으로 늘리고, 스피드 훈련과 LSD 훈련을 적절히 섞었다. 전문적인 훈련법이 아닌 내가 임시로 만든 야매(?) 훈련법이라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라톤 대회 전날 대회장 근처의 사우나에서 잤는데 기대감 때문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결국 네 시간 남짓 자고 멍한 기운으로 일어났다. 사우나에서 나오면서 오늘 좋은 컨디션으로 대회를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몸에 탄수화물을 축적하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사우나 락커 안에 있는 빵과 우유를 주섬주섬 꺼내 먹고(이를 전문용어로 ‘카보로딩’이라고 한다. 빵과 우유를 주섬주섬 꺼내는 것까지 포함하는 용어는 아니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씻고 선크림을 꼼꼼히 발랐다. 사우나 앞 편의점에서 대회 중에 먹을 에너지바를 몇 개 사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여의도 한강공원 이벤트 광장으로 향했다.


바람이 조금 불기는 했지만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개운한 날씨였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강을 보고 있으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일 년 전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달리기로 마음먹은 때가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겨울이 모습을 감추고 봄이 열리는 듯한 날씨였고 그래서 달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 도착하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복장을 하고 몸을 풀고 있었다. 단체로 온 참가자들은 간이 테이블을 잡고 앉아 마치 축제 현장에 온 듯 들뜬 목소리로 떠들고 있기도 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니 압도되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곧 시작할 대회가 기대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쭈뼛쭈뼛 스트레칭을 하고, 물품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개회식을 보고 있으니 어느덧 대회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여의도 마라톤 대회는 아홉시 조금 넘어서 시작되었다. 컨디션도 괜찮았고, 날씨도 좋았고, 스트레칭도 철저하게 했지만, 21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인 하프마라톤은 역시 길고도 길었다. 5킬로미터를 남기고는 정신이 몇 번이나 아찔해져서 달리는 것 자체에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2킬로미터 구간이 가장 고비였다. 발목이 뻐근하면서 발바닥이 타는 듯이 아려서 마지막 2킬로미터를 달리는 10분 남짓의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멈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달리기를 멈추고 걸어서 결승선을 통과하면 오랫동안 후회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 내 몸은 브레이크가 고장났어, 여기서 조금 더 달린다고 죽지는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이 악물고 달렸다.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고 처음 깨달은 사실이 있다. 페이스 메이커는 기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오버 페이스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앞사람만 부지런히 좇다 보니 힘든 것과는 별개로 나는 어느덧 개인 최고기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 앞에 달리는 사람 하나하나는 나의 경쟁자가 아닌 러닝 메이트였던 것이다.


다행히 근육이 끝까지 굳지 않고 말을 잘 들어서 좋은 기록이 나왔다. 나의 여의도 하프마라톤 대회 공식 기록은 1시간 50분 12초였다. 일 년 전 동네에서 혼자 달렸던 하프마라톤 기록보다 4분 정도 앞선 기록이었다. 결승선까지 마중 나온 아내에게 제대로 인사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만큼 유의미한 기록을 달성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간식 부스에서 이온음료와 빵을 받고 한강공원에 앉아서 멍하니 쉬다가, 물품 보관소에 맡긴 소지품을 찾고 완주 메달을 받았다. 하프마라톤으로 받은 첫 메달이었다. 스스로 어깨를 토닥이면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냈다. 완주한 것도 대단한데, 기록도 좋아. 최고야.


장거리 달리기는 어쩌면 스스로를 칭찬하는 법을 익힐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이 아닐까. 길지 않은 거리라도 목표를 세우고 완주에 성공하면 스스로가 절로 대견해진다. 스스로를 칭찬할 일이 없었다면 부디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새삼 설레는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어른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동안 했었는데, 요즘은 설렘을 간직할 줄 아는 어른이 좋은 어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달리기를 할 때의 설렘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요즘 되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이 있을까. 기록에 집착하지 않는 것. 하루하루의 실천에 집중하는 것.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는 것.


나는 달리기로 인해 비로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되었다.






* 달리기 토막 상식 –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6:00’, ‘5:30’ 등의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사람들을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라고 하는데, 페이스 메이커는 이름 그대로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의 페이스 조절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6:00’ 피켓을 들고 있는 페이스 메이커는 1킬로미터 당 6분의 속도로 참가자들과 함께 대회를 주파한다. 대회 내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규모 있는 마라톤 대회에서는 대부분 프로에 준하는 러너들이 페이스 메이커를 맡는다.


마라톤 대회를 나간다면 원하는 속도의 피켓을 들고 있는 페이스 메이커 곁에서 열심히 달려보자. 페이스 메이커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Canaan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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