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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날 Mar 20. 2024

러너들의 기록 무덤



며칠 동안 많은 비가 내리고 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주로 달리기를 하는 산책로는 동네 하천을 두르고 있어서 지대가 낮은 편이다. 오랜만에 달리기를 하러 산책로를 찾았는데, 폭우로 범람한 물이 아직 다 빠지지 않아서 하천의 수위는 산책로와 맞물린 채 내가 서 있는 바로 옆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오늘 달려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산책을 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서 심호흡을 하고 발을 굴리기 시작했다.


산책로에 설치된 표지판들이 급류에 떠밀려온 잡초에 목이 졸린 채 쓰러져 있었다. 작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비가 생각보다 심하게 내린 것 같았다. 갈색으로 물든 무성한 잡초를 목도리처럼 두른 채 전부 같은 방향으로 누워있는 표지판의 분위기가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이 선선해서 가을이 바짝 다가온 것 같았는데(장마철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오늘 방심하고 나왔다가 예기치 못한 땡볕에 제대로 당했다. 오후 내내 흐릴 예정이라는 일기예보까지 확인하고 나온 참이었기에 이런 갑작스런 화창함은 배신감마저 느껴질 만한 것이었다.


5킬로미터 반환점을 돌기 전부터 등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은 작열감이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달리는 속도를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 치솟은 심박수는 내려올 줄 몰랐다. 9월에 찾아온 이 갑작스런 더위는 정체가 뭐란 말인가.


몸에 열이 올라오고 숨이 차서 결국 목표했던 10킬로미터를 완주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달린 거리를 7.77킬로미터로 맞추고 싶어서(괜히 그러고 싶은 날이 있다) 마지막 1킬로미터를 걷다시피 하는 속도로 어기적거리며 원하는 거리를 채웠다.


더운 날씨에 몸이 처진 나는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사서 목을 축였다. 그제야 몸에 시원한 기운이 도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 이번 더위는 11년 만에 찾아온 가을폭염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이상 기후의 일종일까. 기상청이 날씨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 슬슬 가을이 오나 싶었는데 가을은 아직 어림도 없다는 듯 폭염이 빳빳하게 고개를 내민 것처럼 말이다. 봄에 반짝하고 찾아오는 추위가 꽃샘추위라면, 가을에 찾아오는 이런 더위는 ‘꽃샘더위’라고 불러야 할까.


목표 거리를 완주하지 못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이온음료를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년에도 이맘때 처음으로 달리기 완주를 실패했던 것 같다. 여러모로 러너들이 방심하다가 뒤통수를 맞는 시기다. 옷을 생각보다 두껍게(혹은 얇게) 입는다거나,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맞는다거나, 내가 당했던 것처럼 예상치 못한 폭염을 맞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여름과 가을의 경계, 대략 9월 말에서 10월 초까지의 시기는 ‘러너들의 기록 무덤’이라고 불릴만하다. 다만 어디 가서 이 말을 상식인 것처럼 떠들면 곤란하다. ‘러너들의 기록 무덤'은 내가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만큼 유명한 말이 되기를.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새삼 미래의 기후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INFP는 자주 이런 생각에 잠긴다). 장마전선, 계절풍, 꽃샘추위⋯.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기후나 계절감이 더 이상 우리나라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어느 기후학자는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머지않아 사라지고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 열대기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미래의 아이들은 우리나라와 지구의 기후에 대해 어떤 교육을 받게 될까.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나는 오늘과 내일의 기후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지 출처: Times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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