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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날 May 16. 2024

구불구불한 오후



십 년간 장롱면허였던 나는 얼마 전 중고차를 구입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열 시간의 운전 연수를 받고 선생님에게 운전에 소질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문득 다음 주에 예약한 피부과가 생각났다. 한 달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가서 턱수염 레이저 제모를 받는 곳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다음 주에 직접 운전해서 피부과를 가보기로.


원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길이었는데, 차 안에서 노래를 들으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드라이버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베이스음이 내 몸을 둥둥 울렸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피부과 건물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골뱅이 주차장이었는데, 주차장 천장이 나를 향해 무너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었다. 그때부터 차 안의 노래를 껐던 것 같다.


저 밑으로 출차하는 소리가 들려서 주차장에 진입하다 말고 잠시 멈췄다. 엄청난 경사 때문에 꼭 롤러코스터 출발 전에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오른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차는 내 차의 왼쪽 사이드미러를 아슬하면서도 우아하게 스쳐지나갔다. 그 모습에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주차장은 마치 인상 깊은 첫인상을 끝까지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은 듯, 내부 역시 진입로 못지않게 좁았다. 나는 비상등을 켜고, 출차하는 차들에게 중간 중간 길을 내어주면서 좁은 주차 라인에 차를 욱여넣었다. 덤벙대며 주차를 하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피부과인데요, 예약한 시간이 지났는데 혹시 오고 계신가요?”

“아, 네, 제가 지금 건물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있거든요.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미리 힘을 빼놓은 덕분일까. 그렇게 아프던 레이저 제모가 오늘은 아프지 않았다. 제모를 마친 나는 제모 받던 자세 그대로 누워서 의사 선생님에게 발톱 무좀 상담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덤덤한 말투로 바르는 약을 처방해준다고 했다. 상담은 일 분 만에 끝났고, 의사 선생님은 서둘러 치료실을 나갔다. 병원이 오늘따라 바쁜 모양이었다.


원무과에서 만 원이 청구되었다. 발톱 무좀 진료 내역이었다. 이럴 거면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기 전에 검색이라도 한번 해보는 건데. 평소 나는 만 원에 이런 식으로 미련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왠지 만 원 한 장에 괜한 후회가 밀려왔다.


진료비를 수납하고 약을 처방받으러 병원 건물을 나왔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기분은 찜찜했다. 찌그러진 내 시선은 곧 가게 하나에 꽂혔다. 병원 건물 앞의 전통 꽈배기 포장마차였다.


사실 시선보다 먼저 꽂힌 것은 냄새였다. 설탕 범벅의 따뜻한 밀가루 냄새는 언제나 인간에게 안도감을 주지 않았던가. 나는 꽈배기 한 봉지를 사서 그중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입술에 묻은 설탕이 금세 녹아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설탕으로 코팅된 입술을 혀로 훔치자 단맛이 찌릿찌릿 혀를 울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사람이란 참 단순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꽈배기 하나로 내 마음의 전구가 다시 켜졌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꽈배기 봉지를 던져 넣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꽈배기 냄새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오늘 같은 하루면 나쁘지 않은데. 꽈배기 냄새를 맡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골뱅이 주차장 때문에 쪼그라든 마음은 꽈배기 덕분에 다시 펴졌다. 구불구불한 것들로부터 울고 웃은 어느 날의 오후였다.




이미지 출처: 클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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