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노동자의 난데없는 위기감
카페의 파니니 기계에 빵이 탄 채로 또 눌어붙었다. 세척용 약품을 뿌려 탄 부분을 불린 뒤 생수를 뿌려 끌로 긁어냈다. 약품이 깨끗이 없어질 때까지 이 짓을 적어도 다섯 번은 반복하는 동안 주문 들어온 커피도 만들고 케이크도 포장해야 했다.
글쓰기 습작을 하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원한 카페에서 어느덧 1년 반째 일하고 있었다. 돌체 라떼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연유를 넣은 라떼를 의미합니다―카페에 대한 자질구레한 일들에 적응하다 보니 1년이 훌쩍 지났다. 파니니 기계를 청소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동안 글쓰기 습작은커녕 카페에 적응하기도 벅찼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무렵에는 아들이 태어나 좌충우돌 육아 생활이 시작됐다.
'카페를 차릴 것도 아닌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이제는 슬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파니니 기계 청소를 하며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동안 몇 개의 작은 문학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지만, 하루에 적어도 여섯 시간씩 커피를 내리고 파니니를 굽고 케이크를 포장하면서 스스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카페 노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각심이 든 것과는 별개로 퇴사한 뒤의 계획은 막연했다. 국비로 출판인을 양성하는 서울출판예비학교(SBI)에 지원해 보고 떨어지면 출판사에 바로 이력서를 넣을 생각이었다. 나를 받아 주는 출판사가 없다면? 이 물음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 내 계획의 막연함을 여실히 보여 줬다.
그럼에도 나는 정신이 어떤 계기로 변했는지는 몰라도, 어서 카페에서 탈출하고 글로 먹고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시도해 봐야 한다고 스스로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소 충동적인 자세로 마음먹은 것을 단숨에 실행에 옮겼다.
서울출판예비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비로 운영하는 출판인 양성 기관답게 경쟁이 치열한 편이었다. 경쟁률은 10대 1 정도로, 얼핏 보면 낮은 것 같지만 문제는 경쟁률에 허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서류 전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일단 30권의 독서 소감문을 써야 했다. 한번 지원해볼까 하다가도 여기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50권을 요구했다고 하니 제법 너그러워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인상 깊게 읽은 책 1권을 '편집자의 관점'에서 비평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편집자가 되려고 지원했는데 편집자의 관점을 요구하다니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경력 있는 신입을 뽑는 것 같아 많은 지원자가 억울한 마음으로 꾸역꾸역 쓰게 되는 항목이었다.
어찌 됐든 이곳에서 책덕후들과 함께 출판에 대한 각종 실무 기술을 익힌 뒤 원하는 수준의 출판사에 취업해 남는 시간에 글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서류 전형은 합격했고, 이제 필기시험과 면접이 남았다.
필기시험은 1교시와 2교시로 나눠 두 시간 반 동안 치렀다. 조사와 의존명사의 올바른 띄어쓰기를 가리는 문제(여러분은 ‘어느정도’, ‘그까짓’, ‘할뿐이다’, ‘말하는대로’의 올바른 띄어쓰기를 아시나요?), 잘못된 사이시옷을 올바르게 고치는 문제(‘햇님’을 ‘해님’으로 고치는 등), ‘편집(編輯)’ 같은 한자를 한글로 음차하는 문제 등이 기억난다.
1교시부터 문제가 너무 어려워 멘붕이 온 상태로 쉬는 시간에 편의점에서 산 소시지를 씹고 있는데, 감독관이 응시자들을 향해 건넨 말이 정신을 다시 붙잡는 데 힘이 됐다.
“문제가 어려우셨죠? 사실 이거 우리 협회장님도 다 못 풀만큼 어려운 문제들이에요. 매년 필기시험 점수의 판가름은 2교시에 나니까 부디 포기하지 마시고 2교시 시험까지 힘내 주세요.”
그렇게 어찌어찌 2교시 논술 시험까지 마치고, 그래도 아는 것은 다 적고 나왔다는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155명의 응시자 중 성적이 높은 50명을 가려서 면접을 본다고 하니 필기시험 경쟁률은 3대 1 정도였다.
면접 대상자 발표날, 장모님이 집에 와서 함께 고깃집에서 오겹살을 구워 먹고 카페에서 아이스라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합격자 발표 공지가 언제 올라오는가에 쏠려 있었다.
어느덧 8개월이 된 아들을 데리고 퇴사한 카페에 오랜만에 들르니 다들 많이 예뻐해 줬다. 백화점에 갈 일이 있다는 장모님을 차로 배웅해 주고 집으로 돌아와 서울출판예비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공지사항에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제20기 채용예정자과정 면접 대상자 안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 대상자 명단을 확인했다.
50명의 합격자 명단 중 내 이름은 없었다.
이미지 출처: Webstaurant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