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옆의 산과 들은 며칠째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다. 나뭇가지마다 소복소복 얹혀있는 눈 때문에 동화 속 눈의 나라에 놀러 온 듯하다. 아내와, 나와 2살 터울인 작은 누나와 함께 시골 어머니 집을 가던 새해의 어느 날이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하다.
음력 12월 끄트머리쯤이 생일이신 어머니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며칠 남기고 생일상을 받아야 해서 항상 본 날보다 이르게 생일축하를 받으셨다. 그해에도 며칠씩 내리는 눈이 그치기를 기다려 내려가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어린아이들처럼 우리는 와~환호성을 질렀다. 어머니 집 앞에도 이웃사람들이 쓸어주어 다행히 걸어 다니는 길은 눈이 없고 옆으로 담처럼 눈이 쌓여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던 몇 해 전 아내는 어머니의 생일을 '형제모임'회비를 매달 걷어서 1월 초에 뷔페식당을 예약해서 치르자는 의견을 내고, '형제모임'의 취지와 각각의 회비 액수를 정리한 의견서를 A포용지 2장에 깔끔하게 정리하여 설날아침에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며 의견을 구했었다.
회비도 많은 액수가 아니라 모두들 흔쾌히 찬성했고 아내가 총무를 맡아 통장을 개설하고 매달 입금을 체크했다. 덕분에 매년 1월 초에는 40여 명에 육박하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맛있는 음식도 자유로이 먹으며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했었다. 어머니는 축하도 받고 축하금도 받는 기분 좋은 자리라서 늘 흐뭇해하셨다.
대가족이다 보니 어느 한 집에서 모이기에는 불어나는 인원을 감당할 수 없었고, 어느새 8남매의 반 이상이 은퇴를 앞두고 있어서 조카들의 결혼으로 불어나는 인원에 맞게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자주 볼 수 없는 여형제들의 가족들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어머니의 생일모임은 매년 기다리는 즐거운 가족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그날도 어머니가 한 달가량 서울에 계실 시간을 고려해 평소에 드시는 약을 챙기고, 난방을 약하게 조절해 놓고 아침나절에 출발해 나의 집으로 모셔왔다. 아내와 두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급성 충수염으로 수술을 하고, 한 달을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많이 여위셨다.
틀니를 빼놓고 계셔서 볼이 홀쭉해 보여 더 그렇기는 했겠지만 90이 넘은 노구를 혼자 감당하시느라 힘드신 것 같았다. 둘째 형도 일선에서 은퇴하고도 남은 나이이고 혼자몸이니 어머니 곁에 계시면 좋으련만 서울을 못 떠나신다. 다행히 근처에 혼자된 큰누나가 살고 있어 많이 챙겨드린다고 해도 한해 한해 힘들어 보이신다.
나 역시 이번에 은퇴했으니 어머니 곁에 가서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아직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서울에 남아있으니 선뜻 용기를 낼 수 없다. 어머니도 그걸 아시는지 시골로 내려오지 마라고 하신다. 당신은 괜찮다고.
옛말에 '열 자식이 한부모 못 거느린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8남매도 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살지를 못한다. 어머니 세대와 바뀌어진 환경 탓이기도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자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형제들 눈에는 우리 부부가 제일 어머니한테 신경 쓰고 잘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제수씨가 어머니께 '어머니, 셋째 형님네가 제일 효자지요?' 하고 웃으며 얘기하니 어머니가 고개를 저으시면서 '효자는 없어' 하셨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마음껏 젊은 시절을 보내지도 못하고, 해방되던 해에 큰아들을 낳고 계속해서 6. 25 전쟁을 겪으며 힘든 시절에 아이들을 많이 낳아 당신의 젊음도 없이 키웠건만 당신의 마음에 흡족한 자식은 없었나 보다. 아니면 다른 형제들이 서운해할까 봐 모두 다 똑같다는 뜻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많이 힘드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해의 어머니 생일모임은 거의 모든 자손들이 참석해서 즐거웠고 음식도 맛있어서 오랜만에 어머니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었다. 어머니 곁에 증손자들이 둘러앉아 생일축하노래를 불러드리고 몇몇은 사진을 찍느라 바빴던 그날이 그립다. 그날이 어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 생일모임이 될 줄 몰랐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