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탔네

(두려움에 휩싸이고)

by 구슬 옥

"어미야 우리 지금 비행기 타고 가는 것 같다. 하늘도 파랗고"

"힘들지 않으세요?"

"응 괜찮아, 좋아"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올라가는 구급차 안에서, 그녀는 틀니를 빼어 홀쭉해진 볼을 오물거리며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었다.


일주일 가까이 있었던 지방의 대학병원에서 별다른 치료도 없이 검사만 할 때는 "그냥 집에 가자" 하는 말씀과 "밥 먹고 와~" 하는 말씀만 하시더니, 이제 파란 하늘까지 보이는 구급차로 빠르게 서울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그녀에게 희망적으로 느껴진 걸까.


평일이라 다행히 서울에 들어와서 약간 밀렸고 응급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노인 환자고 겉으로 봐도 복수가 가득 차 위급해 보였는지 가져온 검사기록들을 보면서 간단히 피검사를 하더니 입원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뒤따라 자동차로 올라온 남편과 큰 시누이 그리고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큰 아주버니와 막내 시동생까지 여러 명이 병실로 따라 올라갔다. 초음파를 보며 가득 차오른 그녀의 배에서 500cc~1000cc가량의 물을 빼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들은 모두 '아~ 드디어 뭔가 치료를 받아볼 수 있겠구나 역시~' 하는 감탄을 하며 기대에 차서 주치의가 설명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나 복수에 피가 섞여있다고 해서 조금 불안했다.


다음날 새벽에 CT를 찍기로 하고 내가 병원에 남아 그녀를 간호하기로 했다. 남편은 그동안 병원에서 계속 있다 보니 너무 피곤하다고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고, 나이 드신 큰 아주버님도 집에 가셔야 하고 함께 따라 올라온 큰 시누이는 나와 함께 병원에 남는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70이 다 되어가는 나이라 병원에서 자는 것은 무리여서 내가 혼자 남기로 했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의 대소변을 처리해 줄 사람은 나밖에는 없었다.


예전에 내가 몇 번 모시고 다녔던 병원이라 그녀도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밝았다. 식사는 죽이 나왔지만 입맛이 없다고 몇 숟갈 받아 드시고 물로 조금씩 입을 축이셨지만 다리에 경련이 오고 아프다고 간간히 비명을 지르셨다. 간호사가 넣어주는 진통제로 견디시다가도 계속 여러 번 진통제를 넣어야 했다.


늦은 밤 10시가 넘어서 병실 안의 다른 환자들이 모두 잠들어 있고 그녀도 곤하게 자고 있는데 넷째 시동생의 전화가 왔다. '형수님, 저 지금 병원에 왔는데 안 들여보내주네요. 내려오셔서 저 좀 같이 들어가게요' 회식이 있어 못 온다고 하더니 늦은 시각에 온 시동생을 올라오게 하는 게 괜찮을지 몰라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조용하다.


'지금 병실에 계신 분들이 모두 주무시고 어머니도 주무시는데 그냥 집에 가셨다가 내일 퇴근하고 오시면 어떨까요? 술도 드셨는데' 시동생은 본인도 내일 오려고 했는데 막냇동생이 회식이 문제냐 하며 하도 뭐 라그래서 왔다고 하면서 집으로 갔다. 그때 그냥 병실로 데리고 올 것을.


갑자기 내일 새벽에 CT를 찍다가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늘 넷째를 못 봐서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신장 수치가 많이 낮아서 더 나빠질 텐데... 하며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혈압을 체크하려고 들어온 간호사가 나에게 '피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검사 안 하실 거예요.' 한다.


나는 그러면 다행이다 생각하고 중간중간에 피검사며 혈압을 재러 간호사가 들어왔고 엑스레이까지 복도에 마련된 기계에서 그녀를 찍게 해야 돼서 거의 뜬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검사를 위해 신장을 보호하는 약을 어머니에게 드시게 하고 호출을 기다렸는데 아침 회진시간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병실 담당 주치의가 와서 검사결과가 안 좋으면 CT를 안 찍겠다고 했냐고 내게 물었다. 그건 간호사 말이었는데.


나는 신장수치가 많이 안 좋은 지를 물었다. 담당주치의는 찍고 더 안 좋아지면 신장투석을 하면 된다고 했다. 90이 넘어 식사도 못하시는 노인한테 그 힘든 신장투석을 한다고? 나는 그건 안된다고 했다. 주치의는 CT를 못 찍으면 위내시경이라도 하라고 했다.


나는 식사를 잘하셨던 그녀라 사실 위내시경보다는 신장 치료가 급하니 그것부터 해달라고 했다. 담당주치의는 신장은 바로 좋아지지 않는다며 위내시경을 하라고 오더를 내렸다. 이런 검사들을 안 하려면 요양병원으로 나가셔야 된다고.


금요일 오후가 되니 함께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넷째 동서가 오고 그러고도 위내시경 검사는 없어 그녀는 계속 금식을 해야 했다. 끼니마다 간신히 죽 몇 숟갈 밖에는 못 드셨던 분이 금식까지 해야 되고 물도 못 드시는 상황이라 더 힘드신듯했다.


주말저녁을 책임지는 시누이들이 일찍 오면서 나는 집으로 들어가 쉬라고 떠미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집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그녀가 위내시경을 하고 돌아와 대성통곡을 했다는 걸 들었다.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해보시는 위내시경 검사가 수면이었지만 많이 힘드셨던 것 같았다.


일요일 오후에 교대하기 위해 남편과 병원으로 가니 주말에 큰동서와 조카들이 왔다 갔고 그녀의 상태는 변동이 없었다. 누워계시는 게 힘들어 보여 옆으로 눕게 몸을 돌려드리고 다시 뉘어드렸다. 그래도 답답하신 것 같아 남편이 휠체어에 그녀를 안아 태우고 병원의 이곳저곳을 보여드리며 다녔다.


일요일 늦은 저녁의 병원은 고요하고 기괴했다. 중앙의 공간이 비워있는 개방형 구조는 두 개의 건물이 이어지는 5층복도에서도 1층 현관까지 훤하게 보이는 모습이라 우리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출연해 연기하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가만히 구조물로 연결된 병원 안을 볼뿐 말이 없었다.


다음날 남편은 잠 못 자고 밖의 휴게실에 있다 보니 너무 피곤하다고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그녀의 식사를 챙기고 몇 숟갈 죽을 드시고 남긴 것으로 나의 아침도 해결했다. 그녀가 제대로 식사를 못 하니 나 또한 입맛도 없고 먹고자 하는 의욕도 없어 남은 죽으로 식사를 때우는 편이었다.


담당주치의와 교수가 아침 회진을 왔지만 검사 결과 특별하게 치료할게 나온 게 없는지 계속 다른 검사를 주문했다. 부인과 검사를 받아보시라고. 그러고 나서 피부과에 연계해서 종양내과로 가서 그녀의 오른쪽 다리 사타구니에 알사탕같이 생긴 혹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부인과는 지방 병원에서 했었다고, 그때 영상자료도 제출했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번 더 하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힘들게 해 드려 미안하다고, 이제는 힘든 검사는 없다고 했다. 다행히 산부인과에서 검사하실 필요 없다고 연락이 와서 오후에 종양내과에 내려가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를 하고 올라왔다.


그녀는 다행히 정신이 맑았고 간간히 얘기도 잘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큰 병원에 왔으니 병원비가 많이 나올 텐데 어떡하니? 그냥 집으로 가자.' 하는 얘기도 틈만 나면 하셨다. 내가 걱정 마시라고. 어머니가 주신 돈도 있고 형제들이 모아 둔 돈도 있고, 그리고 모자라면 서로 조금씩 내면 괜찮다고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도 자식들 돈 많이 쓸까 봐 걱정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아프기 전에 내게 적금을 들어 모았다고 3백만 원을 주셨었다. 혹시 당신을 위해 쓸 일이 생기면 쓰라고. 그리고 조카의 차로 병원에 가실 때는 셋째 아들 오면 주라고 큰 시누이에게 그녀가 갖고 있던 현금 70여만 원을 맡겼었다. 그녀는 어렴풋이 당신이 떠나야 할 시간들이 다가옴을 느꼈던 것일까. 부족한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혹시라도 당신이 병원에 가야 할 때 아니면 돌아가셨을 때 쓸 비용을 얼마간이라도 남기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시간은 흘렀다. 낮에도 다리가 비틀리는 아픔에 소리를 지르기도 하셔서 진통제를 자주 맞으셔야 했고, 식사는 죽 몇 숟갈에 과일주스나 물 약간을 드셨고 대변을 보아야 할 때는 몹시 미안해하셨다. 다행히 내가 처리해 드리는 방식이 편하셨는지 주말에 교대하는 시누이들에게 잘 못한다고 셋째처럼 하라고 하셨다니 그나마 감사했다.


나는 그녀에게 '어머니 대세를 받으실래요? 하느님께 다 맡기고 함께 기도하시게.' 이렇게 권했다. 우리와 여행하실 때 주일이면 여행지 성당에 함께 가셔서 미사에 참례하셨고, 시골에 계실 때도 성당에 함께 가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었다. 그래도 때가 되면 절에 가서 등을 달며 공 드리는 걸 보면서 그녀를 굳이 성당에 모시고 가 세례를 받게 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그녀만의 시간을 바라보면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그러면 좋겠다. 받고 싶다.' 하셨다. 병원 원목실의 수녀님께 부탁드리니 바로 올라오셔서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다른 환자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 커튼을 둘러치고 그녀는 누운 채로 수녀님의 몇 가지 물음에 답하면서 대세를 받으셨다. 그리고 마침기도를 하시자 그녀는 어디서 솟았는지 큰 목소리로 '아멘' 하셨다. 세례명은 '데레사'로 받으셨다. 일생을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헌신하신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낮에는 넷째 동서가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드리니 시원하셨는지 '잘했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항상 천진난만한 동서는 '형님, 저 어머니에게 칭찬 처음 받으니 너무 좋아요' 했다. 그래도 함께 간호하는 동서가 있어 나도 맘이 편하고 좋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떠났을 때 자식들 모두가 그녀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시골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셔서, 죄송하지만 마음이 놓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우리들 곁을 떠나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겁이 났었다. 나의 친정부모님도 갑자기 떠나셨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이 두려움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식들도 다들 나이가 들어 함께 늙어가고 있어 언젠가는 그녀도 떠날 것을 알고 적절한 시기에 편안하게 가시길 바라면서도 문득문득 두려웠었다. 특히나 갑자기 자식들 얼굴도 못 보고 가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올라올 때면 은퇴하게 되면 몇 해라도 그녀 곁에 가서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우선은 혼자된 시누이들이 그녀와 함께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딸들은 '어머니 성격이 세서 같이 못살아'라는 말을 했고, 잔소리도 많이 했다. 친정어머니라 흉허물이 없어서 그런 건지. 어쩌면 아들이 몇이나 되는데 딸이 왜 모시고 살아? 하는 사고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남편이 은퇴하고 1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 시골 그녀 집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직장 다니느라 못 다닌 외국여행을 몇 달씩 다녀오고, 아직 몇 년은 더 일을 해야 돼서. 아직 아이들이 독립하지 못해서 등등. 그녀의 부지런한 자식들은 은퇴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게 모두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것도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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