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나비가 되어

(잘들 살아라~)

by 구슬 옥

'어머니가 이상한 거 같아 병원으로 와'

성당으로 들어가다 큰누나의 전화를 받았다.

'알았어요 미사 끝나고 바로 갈게요'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전화내용을 말하자 그녀는 느낌이 이상한지

'가요 지금. 미사 끝나고 가면 안 될 거 같아. 얼른 가요' 재촉하며 앞서 나갔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막냇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빨리 오세요 의사가 어머니 시티 찍으라고 하면서 보호자 서명하라고 해요 어떡해요'

'어머니 상태가 어떤데?'

'힘드신지 소리를 지르셔서 지금 간호실 옆방에 기계들 갖다 놓고 난리예요'


병원에서는 힘들어 마지막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께

시티를 찍으라니...

'금방 도착할 테니 그냥 서명하지 말고 기다려. 거의 다 왔어.'

'빨리 와요. 우린 전철시간 맞춰서 집에 들어갈게요. 큰누나 있으니까...'

어젯밤 거의 한숨도 못 자고 어머니의 간호를 하느라 지쳤는지 막냇동생 부부도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어머니가 위급하시다면서 집에 들어간다니...


우리가 병실 복도에 보이자 막내부부는 집으로 간다며 나가고 나와 아내는 간호실 구역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러 기계들의 이어진 선들이 풀어헤쳐진 어머니의 가슴과 손과 다리등을 연결하고 심장박동을 체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지친 표정에 눈동자에 힘이 없다.


하루사이에 달라진 갑작스러운 모습에 놀라 병동주치의를 바라보니 시티를 찍으라고 오더가 내려왔다고 서명을 하란다. 아내는 '아니, 지금 눈동자도 풀려있으신 분에게 무슨 시티예요? 그렇지 않나요?' 하고 조심스레 반문하니 병동주치의도 이해가 되는지 '아, 알겠습니다. '하고 나간다.


기력이 다하셨는지 눈조차 껌뻑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큰누나가 '어머니 왜 이래요 정신 차리세요'하고 크게 우시니 간호사들이 밖으로 나가라고 한다. 아내를 어머니 곁에 남겨두고 누나를 부축해 복도로 나와 큰형에게 빨리 오시라고 전화를 했다.




담당의사가 주말에 학회에 참석하고 와서 얘기하자고 해서 어머니가 이렇게 갑자기 나빠지실 줄 생각 못했다.

그래서 여차하면 우리 집으로 모시고가 근처 병원하고 연계해서 간호해 드리려고 준비했는데 하루사이에 어머니의 상황은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눈에 힘도 없고 초점이 없다. 마치 힘을 다해 우리를 기다리신 것 같다. 나는 어머니에게 '죄송합니다 어머니, 미련한 저희를 용서하세요.'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눈물이 터졌다. 그리고 잠시. 심장박동을 체크하는 화면의 줄이 한 줄로 되는 것이 보여 간호사를 급히 부르니 병동주치의가 들어온다. 복도에 있다가 안에서 내가 부르는 소리에 남편과 큰 시누이도 따라 들어왔다.


주치의는 '환자가 운명하셨습니다. 지금 시간으로 운명하신 걸 선언할까요? 아니면 다른 가족들이 금방 올 거면 조금 기다릴까요?'


아직 큰 아주버니가 오시지 못해서 조금 후에 해달라고 말하자 주치의는 방에서 나가고 큰 시누이와 방금 도착한 작은 시누이 그리고 우리 내외는 한마디 마지막 말도 나눠보지 못하고 떠나신 어머니를 애통해하며 울었다. 병원에서 미리 1인실로 보내주었더라면 다른 환자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우리도 계속 함께 지내면서 떠나가심을 준비했을 텐데... 검사만 이것저것 시키니 어머니의 시간이 그래도 얼마간은 더 남은 줄 알았었다.


그 뒤로 나머지 형제들이 도착하고 다행히 아직 은퇴 전인 넷째가 회사에서 들어놓은 상조회사를 불러 차분히 장례절차를 의논했다. 병원 장례식장에 다음날이나 자리가 있어 어머니를 홀로 병원에 두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연세가 90이 넘으셔서 그런지, 아니면 3주에 걸쳐 지방병원과 서울의 대학병원에 어머니가 계셨던 탓인지 모두들 어머니의 떠남을 받아들였다.


마음 한구석은 뻥 하고 뚫린 듯 허전하고 안정이 안되었지만 다행히 며칠 전 어머니가 대세를 받으셨기에 본당의 교적에 올라있어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서울까지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주셨고 성당 연령회도 서울까지 올라와 기도해 주고 장례절차를 함께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병원 원목신부님께서 장례미사를 해주시기를 청했었다. 그런데 원칙이 본당신부님이 해주셔야 하는 것이고 만일 그곳에서 못 오실 경우에만 할 수 있다고 하시며 수녀님이 본당에 연락하라고 하셨다. 어떻게 해야 될까 많이 망설였다. 장례회사에서 일반적인 장례절차를 진행하는데 천주교식의 장례절차가 함께하는 게 괜찮을까? 어머니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연도도 받고 장례미사도 올려드려야 하는데 서울까지 연령회와 본당 신부님이 와 주실까?


*연도:천주교 신자가 돌아가시면 성당의 교우들이 亡者(망자)를 위해 장례식장에 와서 하느님께 망자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그리고 망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곡조를 넣어 기도하는 것)


그러나 내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본당에서는 흔쾌히 올라오셔서 해주셨고 거기에 힘입어 나는 내가 20여 년을 다니며 봉사했던 근처에 있던 성당의 연령회와 레지오단원들에게도 연도 해주기를 청했다. 다행히 많이들 오셔서 연도 해주시고 장례미사에도 많이 참석해 주셨다. 미사를 주례하시는 신부님께서 어머니가 복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셨다. 대세 받으시고 돌아가신 분이 기도를 이렇게 많이 받고 가시는 분은 별로 없다고 하시며.


형제자매들이 여럿이어서 그런지 조문객이 많았다. 다리가 불편한 큰 아주버니가 형제들과 함께 조문객을 맞느라 무릎을 꿇었다 일어섰다 하느라 많이 힘들어 보였다. 상조회사에서 진행하니 며느리들이 할 일은 음식을 주문하고 받는 일 외에는 많은 일이 없어 때때로 조문객을 맞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분명히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조문을 받는 것인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미소를 띠게 되고 각 테이블마다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소리에 잔칫집 같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같은 행사인가 보다. 태어날 때 기뻐하며 축하하고 음식을 나누고, 생을 다하고 떠나야 할 때도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적이나 친구들을 만나며 조문을 받고 슬픔 속에서도 서로 소식을 나누며 웃고 음식을 먹는다.


친정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20살이 안되었을 때와 20대 초반이었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조문객들이나 친척들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웃고 얘기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초상나서 슬픈 집에 와서 왜들 저렇게 잔치집처럼 웃고 떠들까 하며 마음이 심란했었다.


이제 나이 60이 넘어서 다른 상가도 가보고 처음으로 시어머니 상을 치르며 망자를 대신해서 조문 와주신 분들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생전에 망자와의 추억을 얘기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조문객 앞에서 지나치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은 모습이 아니고 특히 장례를 치르면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실수와 어긋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가 많은 집일수록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며 언성이 높아지거나 남기신 유산 문제로 장례가 끝나기 전부터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집들이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특별한 재산이 없으셨고 병원에 오시기 전에 내게 미리 주신 몇백만 원이 다였고 형제들에게 모두 공개되어 병원비를 결재하고 나머지도 자세히 보고했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다만 자신의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두 명의 자녀가 술이 과해서 혹시 실수할까 눈여겨보며 신경 쓰는 것이 다였는데 입관을 앞두고 예상치 않은 큰소리가 났다. 화장이 아닌 매장의 경우 '관'을 준비할 때 묘를 '석관'을 쓰는 경우와 아닌 경우에 나무의 질이 차이가 난다고 했다.


일흔 살이 넘어 장례를 치르는 큰 아주버니는 먼저 시부모의 장례를 치러본 작은 시누이에게 물어 '석관'을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정하고 상조회사에서는 '관'을 가볍고 묘지까지만 가서 태울 나무로 정해서 준비를 했다. 그러다 입관 전날 밤에 우연히 큰동서가 묘지에 '석관'을 쓰기로 한 것을 알고 '석관'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정했다고 큰 아주버니에게 화를 내면서 잠시 큰소리가 났었다.


형제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조카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라 아이들이 모두 놀랐다. 큰 아주버니도 상주로서 면목이 서지 않아 혹시 화를 내실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 없이 상조회사에 연락해서 일반 매장으로 하기 위한 오동나무관으로 주문을 변경했다. 입관시간이 바뀌고 그러면서 장례미사 시간이 변경되어 성당에 알려야 하는 내 입장이 어려웠지만 다행히 신부님이 배려해 주셔서 잘되었다.


큰동서가 처음부터 장례절차를 아주버님과 함께 의논했었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큰동서는 중간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못하게 된 데 대해 마음의 빚을 갖고 계셔서 일부러 본인은 나서지 않으시고 알아서 잘하실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좋은 '관'에 모시고 싶어서 큰소리를 냈다고 하셨다.


결과적으로는 그때 큰동서가 바로잡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 다른 조상님과 아버님의 묘도 일반 묘로 잘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석관'으로 알고 그냥 장지로 왔었다면 더 큰 문제가 있었을 테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이 상주가 되면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지 몰라 당황스럽다. 특히 그것을 결정해야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더 곤혹스러운 것 같다. 그래서 큰 장례에는 장례위원이 정해지고 세세한 절차나 준비를 경황이 없는 상주들을 대신해서 해주는 것 같다.


요즈음은 상조회사들이 알아서 진행하는데 그래도 몇 가지는 상주들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 있고 그러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상가에 가서 조문을 해도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형제들 모두 슬픔 속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잘 조절하려고 많이들 애를 쓴 흔적들이 보였다. 감성이 다른 형제들보다 풍부한 몇 명의 자녀가 살짝 불퉁거리기는 했지만 서로서로 다독이며 불평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며 성숙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잘 치렀다.


떠나시는 어머님도 '고맙다. 힘들 때도 기쁠 때도 있었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나는 먼저 가겠다. 서로 도와가며 잘들 살아라~' 하셨을 것이다. 10월 말의 쌀쌀한 날씨에도 하얀 나비가 어머니 묘소위를 날으며 우리들 주위를 돌아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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