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었냐?

(나이가 들어도)

by 구슬 옥

띠리링 띠리링~ 전화벨이 울리며 핸드폰에 시골조카 이름이 떴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삼촌이세요? 할머니 아무래도 병원에 가셔야 할 거 같아요. 복수가 차고 있어요."

"그래? 갑자기 왜 그러시지? 알았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게"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 근처에 살고 있는 큰누나의 아들 철이의 급한 전화를 받으며 조금은 불안했지만 며칠 전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집에 갔다가 일주일 만에 올라온 터라 병원에 모시고 가면 괜찮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전화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던 아내가

"어머니 시골에서 아프셨어요?"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응, 식사를 잘 못하시고 가끔 배가 아프신 거 같았어"

"어머, 그러면 병원에를 모시고 가봐야지 안 갔어요?"

"병원 갈까요 하니까 괜찮다고 하셔서 그냥 올라왔지."

"어머니는 원래 몸이 조금 힘드시면 병원에 잘 가시는데 왜 그러셨을까?"

"그러게."


어머니가 명절 지내고 다른 때는 우리 집에서 여러 날 머무시다 가셨는데 그해에는 아내가 추석 다음날부터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갔었다. 어머니도 집으로 가시기를 원해서.


어머니의 식사를 준비해 드리고 집안을 치우고 정리하면서 일주일 가량을 있었는데도 나는 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갈 생각을 못했을까? 그저 소화제만 드리고.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만 믿고 집안일하느라 나 힘든 것만 생각하고.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출발했다. 어제 밤늦은 시간에 조카가 어머니를 모시고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대학종합병원 응급실로 간다고 전화를 했었다. 아무래도 할머니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운전을 하고 내려가려면 잠을 자야 해서 조금 자긴 했지만 걱정으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큰 형님을 모시고 가기 위해 서둘렀다.


병원응급실에 도착해서 보니 어머니가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입원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말씀도 잘하시고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검사만 많이 하고 특별히 약처방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이 든 자식들 고생할게 염려되시는지 "그냥 집으로 가자. 너네들도 힘든데." 하실 정도로 의젓하셨다.


의사는 신장이 많이 나쁘고 쉽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어머니의 배가 엄청 부풀어 있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갔다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원인을 알아야 처방을 내릴 수 있다고 하며 어머니가 생전 받아보지 않던 온갖 검진들만 하는 것이 암을 찾는 것 같았다.


내가 주치의한테 이제서 암을 찾아야 무얼 하느냐고 노인네만 고생하지 않느냐고 하니 암이면 치료할 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없었다.


막냇동생도 내려와서 어머니의 상태를 보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여럿이 있을 필요가 없어 나이 많으신 큰 형님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나만 남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오히려 염려되시는지

"밥 먹었냐? 가서 사 먹고 와"

하시며 끼니때마다 나를 채근하셨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아실 텐데도 계속 환갑이 넘은 아들의 끼니를 챙기시는 어머니가 딱해서 "알았어요. 제가 알아서 해요."라고 통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걱정이 되었는지 아내가 사정을 얘기하고 나머지 아르바이트를 취소하고 내려왔다.


아내는 어차피 지방에 있으면 다른 식구들이 어머니를 뵈러 오기가 힘드니 우리가 다니던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어머니를 이송하면 좋겠다고 주치의한테 요청했다. 아마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주치의의 얘기를 들으며 검사기록들을 받아 구급차에 어머니와 아내가 타고, 나는 함께 올라가겠다는 큰누나를 모시고 뒤를 따랐다.


어머니의 기록이 있던 서울의 대학병원은 3차 병원이라 응급환자는 무조건 받아주게 되어있어 응급실로 들어가 또 필요한 검사를 하고 바로 입원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에 가득 찬 복수에서 조심스레 초음파를 보면서 500cc 정도를 뽑았는데 피가 섞여 있다고 하며 다시 여러 가지 검사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용변을 침대에서 받아야 해서 병원에는 아내가 전담으로 남아서 어머니를 간호하고 다른 형제들은 직장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주말에는 여자 형제들이 간호하기로 하고.


그러나 검사 결과도 의사들이 찾는 것이 없는지 처방은 없고 복수는 그대로 차 있었다. 그리고 소변에도 피가 섞여 나왔다. 구급차를 타고 기대하며 서울로 왔는데도 별다른 치료가 시작되지 않자 어머니는 그냥 시골집으로 내려가자고 하셨다. 그 와중에도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해 그러시는 것 같았다.


아내가 어머니가 걱정하셨던 오른쪽 다리 사타구니 안쪽으로 난 둥그런 혹을 검사해 주기를 청했지만 그것은 제일 마지막에 피부과를 거쳐 종양내과로 내려가 검사했다.


그해 여름에 갑자기 어머니가 '병원에 가야 되니 내려와라'하고 전화를 하셔서 모시고 병원에 갔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다니시던 시골 병원에서는 초음파를 해보니 별거 아닌 것 같다고 신경 쓰이면 외과에 가서 절개하시라고 우리에게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에 있는 제법 큰 병원에 외과 의사는 한 명만 있는지 며칠간 휴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니 동네 병원에 다녀오다 들렸다고 큰누나가 들어오시며 "셋째야,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가 연세가 높으시니 괜히 건드리면 병원에서 고생만 하실 수도 있다고, 아플 때 오시면 약을 드린다고 하시네."


"어머니 어떻게 할까? 병원에 가고 싶으셔? 괜히 건드렸다가 많이 아프시게 되면 여기서 어머니 봐줄 사람이 없는데 아예 셋째 따라서 서울의 병원으로 가시던가"


누나의 말에 어머니는 "그러면 병원 안 가는 게 좋겠다. 아프지는 않아. 신경 쓰이면 잘라내도 된다고 김내과에서 그래서 그랬지. 괜찮아. 너네들 걱정 말고 내일 올라가라." 그랬던 게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며칠 후, 주치의가 조용히 검사결과를 알려왔다. 어머니 피부 조직을 검사하니 '악성 흑색종'이라고. 어머니가 눈을 감고 계셨지만 심상치 않은 결과라는 걸 들으신 것 같았다. 의사는 항암치료 얘기도 하는 둥 여러 가지 연명치료를 얘기했지만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지방병원에서 부터 시작해 벌써 2주가 지나고 3주가 되어가는데도 정확한 원인을 찾는다고 검사만 하느라 지금의 어머니의 모습은 많이 여위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 이야기도 하시고 희망을 갖고 계신 것 같았지만 거의 식사를 못하고 링거에만 의지하고 있어서 90이 넘으신 노구로 힘든 치료를 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아내는 저녁이면 진통제를 몇 번씩 맞아야 잠을 자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그 고통을 직접 보고 느꼈기에 연명치료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고 다른 형제들의 생각도 그런 것 같았다.


우리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바라셨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시며 담당교수는 주말에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월요일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형제들이 결국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옮겨야 되지 않겠냐는 얘기를 해서 아내와 나는 어머니가 계실만한 요양병원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군데를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시기에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냥 내 집으로 모시고 와서 근처병원과 연계해서 간호를 해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말 저녁에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는 누나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의견을 물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머니는 연세가 90을 넘으셨지만 식사도 잘하시고, 여행도 힘들어하셨지만 좋아하셔서 봄에도 모시고 섬진강가의 벚꽃길을 달리기도 하고 순천의 낙양읍성까지도 다녀왔었다. 물론 걷기 힘들어하셔서 휠체어를 대여해 밀면서 다녔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게 건강이 나빠지신다는 건 생각지 못했었다.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도 어머니는 다니시던 절에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 등을 켜시겠다고 하셨다. 아내와 함께 모시고 가서 어머니가 부르시는 대로 신청서를 써드리니 속바지 주머니에서 빳빳한 신권을 꺼내주셨다. 아마도 설이나 생신 때 받으신 용돈을 쓰지 않고 꼬깃꼬깃 모았다가 초파일 등을 켜실 때 아낌없이 쓰시는 것 같았다.


나와 아내는 천주교신자라 불당에 어머니를 모셔드리고 목례만 하고 밖에 나와 앉아 어머니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었다. 아내는 '어머니는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실까?' 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불당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자식들의 식솔들을 위한 기도와, 아직 자녀가 없는 둘째 손자가정에 아기소식이 있기를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남은 삶을 위해서도.


큰형, 작은형이 모두 70세가 훌쩍 넘으셨기에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모두들 당황스럽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고 보내드려야 한다는 사실만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누가 어머니란 '만인의 노비요, 살아서는 태산과 같고, 죽어서는 그 슬픔이 바다와 같은 이'라고 했던가.


맞다. 나의 어머니가 그렇다. 힘든 동네 허드렛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하시면서 우리 여덟 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 어렵고 가난한 살림에도 우리 8남매가 하나도 낙오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서 나름대로 각자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고, 살면서 불쑥 찾아오는 어려운 일들도 함께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식들은 그걸 알고 잊지 않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그녀에게 퉁퉁거리기도 했고, 일부러 하시는 말씀을 무심히 흘려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환갑이 넘어가도록 함께 했던 어머니가 우리 곁에 얼마 못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다.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가 언젠가는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마음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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