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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an 21. 2021

아동학대 가해자에게 '드디어' 사과를 받다.

  부모에게 사과를 받았다. 한 자 한 자에 정성이 담긴 절절한 편지를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대신 처음으로 마음 깊숙이 와 닿는 사과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학대를 했던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하라고 하면, 마지못해 하거나 성의 없는 사과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이는 사과를 받기도 했으나 행동은 제자리였다. 끔찍한 폭언과 폭력은 쳇바퀴 돌 듯 반복됐다. 본인들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한동안 인연을 끊고 지냈다. 학대에 대한 사과를 제대로 받지 않고서는 볼 때마다 화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갑자기 개인 사정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만남을 가졌고, 그들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우선 변명을 하지 않았다. 괜스레 날카로운 태도로 쏘아붙여도 똑같이 갚아주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학대라는 무거운 죄를 저질렀음을 통감하고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냐는 물음에는 “당연히 사과해야 되는 일이니까.”라고 답했다. 그 당연한 사과를 받기까지 이십 년이 넘게 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따져 묻진 않았다. 지난했던 시절을 떠나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사과를 받았음에도 마음속 응어리가 다 풀리진 않았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사과 하나로 퉁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게 전에 없던 보호막이 생긴 기분이다. 매번 자동차 차문 없이 질주하듯 살아서인지 보호막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모순을 알게 됐다.


 그렇다. 나는 부모를 경멸하면서도 사랑을 끝없이 갈구하는 존재였다. 사과를 받고 싶었던 것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학대에 대한 상처가 그토록 깊고도 깊었던 거였다. 부모가 없는 채로 살겠다고 결심하던 나날들에도 누구보다 원했다.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이제껏 버텨왔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자기혐오와 싸워왔던 나날들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양극단의 감정이 사슬처럼 옥죄며 놔주지 않았을 거다.


 이건 분명 학교 폭력 가해자들에게는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감정이다. 부모와는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해서일까. 아니다. 그래도 부모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인가. 아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부모의 학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부모가 날 때린 건 그렇게 악한 이유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진실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 폭력의 해악은 이렇게 크다. 어느 순간 피해 생존자가 본인도 모르게 ‘그때는 맞을 만했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부모의 사과는 이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언제쯤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완전한 회복이라는 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학대는 일어났고 내 몸의 일부에 새겨져 버렸다. 자유롭게 훨훨 날게 될 날을 꿈꾸지만 아득해 보인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가장 받고 싶었던 사과를 받았다는 것. 부모가 노력하려고 한다는 것. 이것들이 희망의 징조다. 대부분의 학대 아동들은 부모에게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스러져 간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지만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다.


 용서는 노력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사과와 용서는 별개다. 너무 쉽게 용서해줘도 안 된다. 다만 이제 과거를 안고 한 발자국씩 떼어볼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정말 다 잊고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기억하고 그 자리에 서서 학대 피해를 증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의 부피만큼 마음이 충분히 자라지도 못했다.


 이제 스스로를 돌보고 성장하는 게 내게 남은 마지막 임무다. 몸의 나이와 마음의 나이를 맞춰보려고 한다.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또 그런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칼날 같은 시간 속에서도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것이니.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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