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신의 눈에 비친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조선통신사 문화교류 2-3

by 구경래

3. 사신의 눈에 비친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조선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통신사가 본 일본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그리고 당시 섬나라 일본은 백성이 살기에 좋은 나라였을까? 그런 걸 알려면 통신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돼. 1624년 사행 때 부사로 일본으로 간 강홍중(1577~1642)이 쓴 『동사록』을 보면 당시 일본 사회를 엿볼 수 있어. 강홍중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일본은 ‘원수의 나라’이자 ‘섬 오랑캐의 나라’란 생각이 확고했던 분이셔.


“산천이 아름답고 토지가 기름지다. 시장에는 물건이 산처럼 쌓였으며, 곡식이 널려 있어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요로움이 우리나라와 견줄 수가 없다.”

“물자가 풍부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살림살이가 아주 넉넉하다.”

“쓰시마 구경꾼은 종일 꿇어앉아 있어도 조용한데, 우리 하인은 못 하게 해도 시끄럽게 떠드니 아무리 법령이 엄하여 그렇다 하지만 실로 놀라운 일이다.”

“교토에서는 통신사가 가는 길이 십 리나 되었지만, 그 먼 길에 물을 뿌려 먼지가 나지 않게 하였고, 밤새 내린 눈길에는 사람과 말이 빠지지 않게 대를 덮어서 마른 땅을 밟는 듯했으니 호령의 신속함도 또한 놀랄 일이다.”

“한양 집에서 에도에 있는 내게 오는 편지가 50일도 채 못 돼 전해지다니 사뭇 놀랍다. 왜인도 또한 성실하고 믿음이 있다.”

“침술이 좋고, 화초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기술 수준도 높다.”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지?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채 삼십 년이 되지 않은 터라 조선은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된 나라 곳곳을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어. 열심히 일할 사람인 남자들도 전쟁으로 많이 죽거나 일본으로 끌려갔고, 전염병도 나돌아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거든. 그러니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은 일본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가 치밀겠어? 그러다 막상 원수의 나라 일본으로 가보니 오랑캐 나라치곤 풍경도 나름 괜찮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높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지. 여러 가지 제도나 법도 우리보다 엄격하고, 교통통신수단도 그 옛날에 엄청 빠름을 알 수 있어. 게다가 의술, 화초재배술, 기술력도 괜찮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거야.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인 고급 기술인력과 식량, 문화재 약탈 등의 부를 이용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음을 사신들도 볼 수 있었던 거지. 따라서 사신으로선 더더욱 분통이 터질 노릇이야.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 원수의 나라와 친선 교린을 위해 떠나는 것이니 원통하더라도 최대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쓴 거지.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경제력이 대단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거고.


일본으로 간 사신이 놀라기는 1643년에 사행길을 떠난 통신사 사신도 마찬가지였어.


“가는 길 곳곳마다 시설이 화려해 눈부실 정도다. 접대가 풍성하고, 사신에게 내놓는 선물이 엄청나서 깜짝 놀랄 지경이다. 섬나라 오랑캐가 이렇게 잘 살다니!”


이때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겪은 터라 조선은 다시 잿더미가 된 국토를 일으키는데 어려움이 무척 많았어. 일본에 이어 청나라에 끌려간 인력도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렀고, 청나라에 맞서 싸운 장수며 신하까지 잃고 말았지. 게다가 북방 오랑캐인 청나라와 신하의 관계까지 맺었으니 조선의 굴욕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그런 시대에 일본으로 가보니 경제도 발전하고, 백성의 삶도 넉넉하니 사신으로선 눈이 부실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거지.


통신사로 떠난 사신의 놀라움은 1655년 사행에도 이어져. 그때 종사관으로 나선 남용익(1628~1692)이 쓴 『부상록』을 보면 보잘것없는 작은 섬으로 여긴 ‘쓰시마의 부유함’과 ‘오사카를 비롯한 도시의 발전’, ‘풍부한 경제력’에 적잖이 놀랐음을 엿볼 수 있어. 그런데 남용익은 이전 사신들의 감탄과 한탄 일변도와는 달리 일본의 발전 사실에 대하여 나름대로 분석을 시도했지.


“일본의 경제발전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하늘이 내려준 자연환경이고, 하나는 상공업의 발달 때문이다.”


재미있지? 일본의 자연환경과 우리나라의 자연환경 중 어느 쪽이 더 좋겠어? 지진과 화산이 그 당시에도 늘 있었지만, 남용익의 눈에는 일본의 자연환경이 더 좋다고 비친 거야. 그리고 더 놀라운 분석을 하고 있어. 유교를 숭상하고 문을 중시한 조선의 처지에서는 감히 입 밖으로 내기도 힘든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거든. 즉, 상공업의 발달을 꼽고 있어! 일본에 견주어 우리 조선은 상공업의 발달이 더디다는 말이지. 조선에서는 하층민의 직업으로 경멸했던 상공업에 눈길을 돌린 것 자체만 해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통신사의 눈에 비친 일본은 부러움 반, 의심쩍음 반이었어. 그렇더라도 안타까운 일은 일본의 경제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거야. 다들 일본에 당한 과거를 잘 아는 탓에 일본을 객관적으로 살피기보단 감정적으로 대하기 일쑤였거든.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일본의 경제가 발달한 까닭을 알아보고 연구했더라면 조선도 크게 바뀌었겠지?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하지만, 때때로 가정을 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정하는데 보탬이 되기도 하니 가정하면 그렇다는 말이야.


일본의 경제발전은 그렇다 치고, 사신들이 본 일본인의 질서의식과 법 제도는 어땠을까? 그때 일본인들은 법을 제대로 잘 지키고 있었을까?


1624년 사행에 나선 강홍중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어.


“일본은 법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으며, 바쿠후의 위엄이 서릿발같이 무서워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다!”

“사행 길에 여러 곳에서 강도나 도둑을 죽여서 그 시체를 길가에 세워놓고 있는 걸 보았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니 ‘백성은 그 형벌이 무서워야 법을 잘 지킨다’고 말한다.”

“조선에서는 죄를 지으면 매질을 하는데, 일본에서는 죄가 무겁고 가벼움을 가리지 않고 모두 참형으로 다스린다. 일본에서 매질하지 않는 것은 원한을 품고 보복할까 두려워한 것이요, 미리 말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낌새를 느끼고 해칠까 두려워서다.”

“조선 사람은 그 성질이 부드럽고 순하므로 덕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일본 사람은 그 성질이 덕으로 다스릴 수 없으므로 형벌이 심하다. 역시 오랑캐 나라라 어쩔 수 없다!”

“일본 사람의 성 풍속이나 결혼 풍습, 남녀 분별이나 제사 문화는 무지하고 서툴다. 아무래도 오랑캐 풍속이라 예절이 없다.”


강홍중에 따르면 일본인의 준법정신, 질서의식은 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음을 알 수 있어. 앞서 쓰시마에서도 일본인과 견주어 조선 하인의 무례함을 한탄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목숨을 앗아가거나 하는 엄함으로 인해 질서를 잘 지킨다 했으니까. 반면, 그 이유가 일본인의 속성이 본래 오랑캐 근성이라 그렇게 해야만 사회질서가 유지된다며 일본의 그런 문화를 무시하는 걸 알 수 있어. 그리고 조선과 다른 사회문화나 예법은 아예 엉터리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런데 그로부터 60년쯤 뒤에 떠난 1682년 사행 때 역관 홍우재(?~?)가 남긴 『동사록』에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많이 있어. 흔히 사행이 시작되면 사행을 따라나선 조선 수행원과 쓰시마 수행원 사이에 자주 다툼이 생기거든.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면 대다수 사신은 쓰시마 사람이나 일본 사람을 오랑캐라 업신여기기 일쑤였어. 하지만 홍우재는 좀 달랐다는 거지.


“사신이 쓰시마 영주를 맞이할 때 결례를 하여 쓰시마에서 성난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앞선 사례를 살펴보니 과연 기둥 밖까지 맞아들이고 보내게 되어 있다. 앞으로는 옛날의 앞선 보기를 잘 따르도록 해야겠다.”

“우리 일행 가운데 하인배가 금령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오가는 게 잦다. 그 때문에 왜인과 더불어 싸우는 일이 있는데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마음 아프기가 이를 데 없다.”


이런 내용을 보면 통신사 일행 가운데는 삼사의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지켜야 할 것을 어기는 사람이 종종 있음을 엿볼 수 있어. 또, 사신조차도 일본은 오랑캐의 나라니 일본과 행한 예전 관례조차 제대로 학습하거나 준비함이 없이 일본으로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지. 그래서일까, 1682년 사행 전까지는 쓰시마에서 조선 수행원을 받들어주느라 다소 조선의 무례함이 있어도 그냥 넘어갔는데, 1682년 사행 때는 쓰시마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알려왔어.


“통신사 일행 가운데 상관 아랫사람은 마땅히 조용하고 삼가야 한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는 것을 금한다.”

“문이나 기둥을 파내거나, 자리나 병풍을 베어내는 것, 건물 벽에 침 뱉는 것을 금한다.”

“계단에 오줌 누는 것을 금한다.”

“말을 달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걸 금한다.”

“여러 관속이 상대할 때 깔보는 듯이 왜인을 내려 보는 것을 금한다.”


홍우재의 기록을 보면 약속과 질서를 어긴 것은 오랑캐 나라의 백성인 일본인이 아니라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임을 알 수 있어. 그걸 홍우재는 부끄럽게 생각한 거지. 솔직히 홍우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봐도 부끄러운 내용이야. 남의 집 물건을 함부로 손실을 입히거나, 아무렇지 않게 침이나 오줌을 누었다는 거잖아. 따라서 오랑캐로부터 그런 지적을 받았으니 통탄할 정도로 부끄러웠던 거야.


역관 김지남(1654~?)도 『동사일록』 에 이렇게 써 두었어. 아, 김지남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역관으로 활약했는데, 역관보다도 더 소중한 일을 한 분이야. 특히, 자초법 즉,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 화약을 제조한 분으로 『신전자초방』이란 책을 저술해 조선의 무기 발전에 공헌한 분이기도 해. 게다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쌓은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과 함께 사대와 교린 외교에 관한 역사와 제도, 행사를 체계화한 『통문관지』를 편찬한 분이셔. 그런 분은 일본을 어떻게 봤는지 어디 살펴볼까.


“우리나라 사람은 정돈되지 못한 것이 몹시 심하다. 길을 갈 때 길을 안내하는 중관, 하관 무리가 말을 타고 달아나기 일쑤라 수를 맞추어 기다리게 한 말이 늘 모자란다. 또, 달려가는데 위아래 차례를 무시하고, 왜인을 욕하거나, 심지어 때리는 사람까지 가끔 있다. 이것은 왜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고, 또한 질서가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니 왠지 우리도 좀 씁쓸하지? 부끄러움보다도 씁쓸함이 드는 건 왜일까? 오늘날로 치면 갑질이 심했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직급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 중관과 하관만 질서를 잘 지키지 않은 게 아니었어. 일본에서 통신사로 온 사신을 모시고 사행을 끝까지 편안히 마치도록 모시는 일은 쓰시마 영주의 몫이었거든. 그런데 통신사 사신으로 나선 삼사조차도 때로는 쓰시마의 안내를 잘 따르지 않았나 봐. 왜냐하면, 사신들은 쓰시마를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섬 정도로 얕잡아 봤거든!


사실 쓰시마는 좀 애매한 점이 있어. 왜냐하면, 형식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로부터 다 신하 지위를 받았거든.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분명히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으므로 조선으로선 일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전에는 분명히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섬이었으니 사신으로선 쓰시마 영주의 말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기도 했어.


그래서일까 때로는 사신이 제 맘대로 배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신이 빨리 가자고 해 접대 준비가 다 된 곳을 그냥 지나치기도 했지. 바쿠후로부터 접대를 지시받은 곳에서는 바쿠후 관리의 지도와 감독 아래 모든 영접 준비를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곳을 그냥 휭하니 지나치니 일본으로선 무척 황당할 것 아냐? 그렇게 되면 그 모든 책임을 쓰시마가 지게 돼 있으니 쓰시마는 나름대로 진땀을 빼기도 한 거지.


하지만, 거기엔 쓰시마의 책임 또한 분명히 있어. 왜 그런가 하면 쓰시마는 조선에서 온 통신사를 이용, 돈벌이하려고 활용한 적도 많았거든. 그러니 사신으로선 오랑캐의 못된 버릇을 고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했어. 어떨 때는 반나절만 가고는 하루를 묵자 하니 에도까지 얼른 국서를 전달해야 할 임무가 있는 사신으로선 그런 쓰시마가 얄밉기도 하고, 예법도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일본인과 달리 조선 사람은 왜 그렇게 질서를 잘 지키지 않았을까?


그건 수행원으로 따라나선 사람 대부분이 정규훈련이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남쪽 삼도에서 급히 뽑혀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또, 자칫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본 수행원과는 달리 곤장 몇 대 맞으면 끝나는 조선 수행원은 당연히 그 질서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질서의식이 없다 하더라도 질서를 지킬 때는 눈치껏 좀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참, 또 하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어. 그건 강홍중이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래. 강홍중이 일본으로 갔을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30년쯤 지난 때였어. 그때 임진왜란에 나섰던 일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결코, 조선의 궁술과 기병이 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군사가 싸우기도 전에 먼저 도망하였으니 이것이 진 까닭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육전과 수전 모두 맞서 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질서의식 이전에 평소 제대로 된 생활을 하였다면, 어찌 병사가 전장에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칠 생각을 하겠니?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도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할 점이야. 요즘 젊은이 중 상당수는 군대로 가더라도 싸우지 않고 도망갈 거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대. 사회 지도층 인사나 그 아들 가운데 국민의 의무인 군 복무를 피하려고 꼼수를 부리는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 아니잖아?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지 않는 국가에서는 병사가 목숨 걸고 전투에 나설 이유가 없어. 그러니 조선 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인이 한 말을 우리는 지금도 새겨들어야 해!



생각거리)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던 조선 관군의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은 씁쓰레하지요?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임진왜란 때 왜 우리 관군은 싸울 생각을 않고 도망치기에 바빴을까요? 제 식구와 제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혀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겠지요? 그나마 나라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덕에 가까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잖아요. 그러니 왜 그런 일이 생겨났는지 정확히 따져봐야겠어요.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겠죠?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도망을 가버리는 군대라면 그 어떤 군대를 만나도 지는 게 빤하니까요!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도록 원인 규명부터 꼼꼼히 해보자고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강한 군대를 만들어 다시는 외침을 당하지 않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려면 무엇부터 손을 봐야 할까요?

keyword
이전 15화2-2. 담배를 즐긴 조선인, 인삼에 빠진 일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