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은?

조선통신사 문화교류 2-4

by 구경래

4. 통신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은?


통신사가 되어 일본으로 떠난 사신이 일본에 가면 속으로 무척 놀란 게 있어. 그게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일본의 경제가 생각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데다 가는 곳마다 물건이 넘쳐 난다는 거였어. 하지만 대다수 사신은 그런 일본 경제와 물자의 풍부함에 한편 부러워하면서도 한편 그걸 배우겠다거나, 가져오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조선으로 쳐들어온 오랑캐 나라의 문물에서 딱히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 탓이야.


통신사로 떠난 사신의 생각이 모두 그렇다면 일본으로 떠난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건 하나도 없겠지? 물론, 그렇지 않아! 사람끼리 왕래하는데 문물을 교류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그러니 통신사로 떠난 사신도 응당 일본에서 여러 가지를 가져왔지. 일본에서 주로 어떤 것을 가져왔는지 알아볼게.


사실 통신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으로 갔어. 이처럼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떠난 외교사절단은 전기통신사,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떠난 외교사절단을 후기통신사라 해. 조선 초기에도 일본으로 사신을 보냈으므로 진작부터 일본에서 필요하다 싶은 것을 잘 챙겨서 조선으로 가져왔지.


조선 세종대왕 10년인 1428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정사로 다녀온 박서생(?~?)은 수차 모형을 만들어 왔어. 수차는 농사를 지을 때 물을 퍼 올리는 기계야. 그 수차의 이점과 도입을 조정에 건의해 우리나라 농사기술에 혁신을 가져왔어. 수차를 이용하면서부터 논이나 밭에다 물을 대기가 훨씬 수월해졌대. 그러니 수차가 농사에 도움이 된 건 물어보나 마나지?


어떤 이는 세종대왕 때 일본을 다녀온 사신이 칡뿌리와 고사리에 대해 알아왔다고 해. 흉년이면 먹을 게 모자라니 그때 칡뿌리와 고사리를 먹으면 당장 배고픔은 이길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그 말의 신빙성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어. 왜냐하면, 중국 춘추시대에 백이 · 숙제가 고사리를 먹고 연명하였다는 이야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높이 평가하므로 고사리를 우리 선조가 조선 시대에 들어서야 알았다는 것은 뭔가 좀 앞뒤가 안 맞지?


그리고 국립중앙과학관의 고사리 자료를 보면 논산시 관촉사에 전하는 은진미륵 이야기에 이미 고사리가 등장하거든. 그에 따르면 고려 시대에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캐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땅속에서 큰 바위가 솟아나며 그 소리가 거기에서 들려왔다고 해. 그래 나라에서는 그것을 신성하다고 여겨 혜명스님에게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어 세우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은진미륵이라는 거야. 그 설화만 보더라도 이미 고려 시대에 고사리는 우리나라에 널렸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래서 세종 때 일본으로 간 사신이 고사리를 가져온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흔한 고사리를 일본인은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알아온 게 아닐까 추측해. 칡뿌리도 마찬가지야. 동북아시아가 원산지인 칡은 워낙 일찍부터 우리나라 곳곳에 퍼졌으므로 칡을 가져온 게 아니라 고사리처럼 우리랑 다른 활용법을 알아온 게 아닌가 싶어.

지금까지 말한 것은 주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 떠난 통신사가 일본을 둘러보면서 배운 문물에 관한 거였지.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주로 어떤 것을 일본으로부터 가져왔을까?


“중국과 무역을 하려면 은이 너무 모자랍니다.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에게 은을 많이 구해 오도록 해야 합니다!”

“북쪽의 여진족 기마병을 물리치려면 새로운 무기가 필요합니다. 일본에서 조총을 많이 사도록 해야 합니다!”

실제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은을 많이 구해와 중국과의 외교나 무역에 적극 임했어.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조총을 사려고 애썼다는 것은 이미 「조선통신사 사건·사고 3. 북쪽 오랑캐를 일본 조총으로 맞서라!」 편에서 말했지. 그렇다면 그런 것 말고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통신사로 떠난 사람 가운데 일본 것을 가장 많이 가져온 사람은 누구일까? 그분은 바로 1764년 통신사 정사로 떠난 조엄(1719~1777)이야. 조엄은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비록 섬 오랑캐이긴 하나 글을 배우고 익히면 중국에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며 일본을 글로써 가르치려고 마음먹었어. 그러다 막상 일본으로 가서 일본 사회를 둘러본 뒤에는 그 마음이 확 바뀌었대. 곧, 글로써 일본을 깨우치려는 생각은 일본의 현실을 잘 모르는 데서 온 착각이라고 생각을 바꾼 거야. 그리고 일본 사회와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려 했어. 그렇다면 조엄이 일본에서 보고 가져온 것은 어떤 게 있을까?


1763년 10월 쓰시마 사스나에 머물렀을 때 조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식물을 보았거든. 그걸 『해사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어.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 또는 효자마라 부른다. 일본어로 ‘고귀위마’라 하는데 그 생김새가 산약과 같고, 무뿌리와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다.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삶아서도 먹을 수 있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든지,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가히 흉년을 지낼 수 있는 좋은 음식이다.”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처음 본 조엄은 씨앗을 구해 곧장 부산으로 보냈지. 앞서 온 통신사 사신은 고구마건, 훌륭한 일본 문물이건 감히 그것을 가져오거나 베낄 생각을 하지 못했어. 왜냐하면, 만약 그랬다간 오랑캐 것을 가져왔다고 조정에서 난리가 날 테니까! 그러나 조엄은 생각이 달랐어. 조엄은 ‘설령 오랑캐의 것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가져와 쓰는 게 옳다.’고 생각했거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구마는 원산지가 열대 아메리카야. 그걸 1492년에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으로 소개해 유럽에 전해졌다고 해. 중국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말이고, 일본 오키나와에 전해진 것은 1597년이래. 그리고 쓰시마에는 1723년에 전해졌으니 우리나라는 그 뒤에 알려진 셈이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63년 현종 4년에 표류하였던 사람이 그곳에서 고구마를 먹는 것을 보고 이 작물을 재배하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고, 신유한의 『해유록』에도 일본의 에도에서 고구마를 구워 판다고 하였어.


그때 일본에서는 고구마가 흉년에 배고픈 걸 덜어준다고 해서 ‘고코이모(효도하는 식물)’이라 일컬었는데, 우리말 고구마는 여기에서 비롯된 거야. 그런데 고구마가 우리 땅에 잘 자라도록 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래 조엄은 쓰시마에서 되돌아올 때 고구마 종자 몇 말을 더 가져와서는 부산진으로 보내 심도록 했어. 조엄은 고구마 씨앗만 가져온 게 아니라 심는 방법, 기르는 법, 보관하는 법까지 죄다 배워와 고구마가 잘 자라면 쓰시마와 땅이 비슷한 제주도 같은 섬에 심게 하여 섬사람이 종종 겪는 식량 문제를 풀려고 한 거야.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조엄이 가지고 온 고구마’라 하여 고구마를 두고 ‘조저’라 일컫기도 했대.


한편, 1764년 8월 새로 동래부사로 온 사람은 강필리(1713~?)였어. 강필리가 동래부에 와서 보니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식물이 있는 거야. 물론, 그건 조엄이 가지고 온 고구마였지. 강필리 역시 고구마가 귀중한 식물임을 깨닫고, 고구마를 잘 기르는 법을 자세히 적은 『감저보』를 지어 널리 퍼뜨렸어. 그러니 고구마를 일본에서 가져온 사람은 조엄이고, 오늘날처럼 우리가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퍼뜨린 사람은 강필리라고 보면 틀림없지! 아울러 이 고구마 덕분에 백성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고!


조엄은 고구마를 가져온 데 그치지 않았어. 조엄은 일본의 각 지역을 오가면서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허투루 보지 않았지. 어느 날 이키섬에 도착하니 이키섬에서 통신사를 맞이하려고 새로 사관을 지었나 봐. 사관에서 통신사 사신이 주로 머물고 생활하거든. 하여튼 그곳에서 조엄은 일본 건축기술의 뛰어남을 본 거지. 그리곤 오랑캐의 나라라 생각했던 일본의 앞선 건축술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집을 짓는데 공과 사를 가리지 않고 다 정해진 치수가 있어 감히 어김이 없으므로 동쪽 집의 창문을 빌려 서쪽 집의 창문에 써도 꼭 들어맞는다 하니 그 또한 아주 훌륭하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이런 건축 규격은 우리나라에서 써먹진 못했어. 일본은 지진이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므로 집을 지을 때 아주 튼튼하게 지어야 했거든. 그리고 건물이 무너지거나 해서 신속히 복구하려면 갑자기 나무를 베어와 다듬고 할 겨를이 없잖아. 그때 건축 규격을 표준화시켜 두었다면 상당히 효과적이지. 무너진 집에서 성한 것 중 필요한 것만 따로 가져오면 살짝 손상을 입은 집에서 바로 쓸 수 있으니 꽤 효율적이잖아.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연재해가 일본과 비교해 심하지 않아서인지 일본의 건축물처럼 표준화된 규약을 만들진 않았어. 우리도 건축물과 관련하여 표준화된 규약은 있으나 일본처럼 그렇게 세밀하진 않았거든. 만약, 우리나라에서 굽은 자연목을 건물 기둥으로 쓴 걸 일본인이 봤다면 기함할 거야. 아무렇거나 비록 우리가 바로 써먹지는 못했더라도 조엄은 이처럼 괜찮은 것, 좋은 것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 우리나라에서도 써먹을 수 있도록 힘썼다는 말이지.


조엄의 활약은 계속 이어져. 1764년 1월에는 오사카 요도바시를 지나는데, 이번엔 물레방아를 처음 보았거든. 그래 ‘물레방아를 배워 가면 농사에 큰 도움이 되겠다.’ 싶어 물레방아를 자세히 보고 그려오도록 했어. 허규(?~?)와 변박(?~?)에게 물레방아 만드는 법을 알아오게 한 뒤, 조선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자세히 그리도록 한 거야. 그러니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수차, 물을 이용해 곡식을 찧는 방아인 물레방아와 관련해 일본에서 보고 익힌 기술을 우리나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우리나라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도 한몫한 셈이지.


통신사가 일본에서 본 것 중 우리나라에서도 이후 사용한 교통시설물이 있어. 바로 주교라는 다리야. 주교란 배를 이용해 만든 다리를 말하는 거지.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나아가는 교통 경로는 크게 두 가지야. 하나는 해로이고, 하나는 육로지. 즉, 부산에서부터 쓰시마를 거쳐 시모노세키, 세토내해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할 때까지는 해로를 이용해. 그러니 뱃길로 가는 거지. 이어 오사카에서부터 교토, 나고야, 에도에 이르기까지는 육로를 이용해. 그러니 땅길로 가는 거야. 그런데 오사카에서부터 에도까지 가는 길에는 하천이 많았거든. 오늘날과 달리 교량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그 하천을 통신사의 그 많은 일행이 배로 건너려면 시간이 무지 걸리잖아. 그래서 일본에서는 통신사 일행이 지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주교 즉, 배로 만든 다리를 죄다 만들어 놓았어. 그러니 통신사가 이동할 때 막힘이 없는 거야. 그 주교 또한 워낙 잘 만든 탓에 통신사로 떠난 사신은 그런 것도 자세히 보고 왔어. 이처럼 일본 기술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활용한 예도 있음을 알 수 있지.


혹시, 주교를 본 사람이 없으면 정조대왕께서 수원 능으로 행차할 때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정조대왕 능행도』를 보면 돼. 8폭짜리 병풍 그림인데 그 중 「노량주교도섭도」를 보면 그 넓은 한강을 어떻게 건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어. 그 주교에 사용된 배는 총 48척으로 불과 열하루 만에 완성했다는 거야. 실물처럼 비슷한 복제품을 보려면 경기도 양평에 있는 세미원이란 정원에 가면 직접 주교를 건널 수 있어.


건축술 외 토목술에도 눈길을 돌린 통신사 사신도 있었대. 일본에서 둑을 쌓는 법을 보고 익힌 거지. 일본인들이 죽부인처럼 생긴 대바구니에다 돌을 가득 넣어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걸 본 거야. 그걸 보고는 ‘우리나라의 서해와 남해에도 저걸 쓰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거지. 이 기술은 바다뿐만 아니라 물을 막으려고 둑을 쌓는 곳이면 어디건 괜찮은 방법이겠다, 그치?


이처럼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 여겼다 하더라도 배울 게 있으면 배우겠다는 겸허한 자세, 겸손한 태도가 중요한 거야. 어느 나라로 가건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잘 정리해 기록으로 남기면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그걸 이용해 국가의 발전도 꾀할 수 있고, 백성의 삶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거야.


생각거리)


조엄보다 앞서 일본을 오간 통신사는 ‘조선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며, 마땅히 오랑캐보다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소중화 의식과 문화 우월감에 빠져 일본의 문물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조엄은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고 일본의 좋은 점을 배우려고 한 게 돋보이지요. 건축과 농사기술, 먹을거리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배워와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조엄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야 할 좋은 자세요, 가르침이라 하겠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사정은 조선 시대랑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해요. 해외로 출장을 떠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을 보세요. 고귀한 세금을 이용해 필요한 목적에 따라 견학을 하기보다는 관광만 즐기다가 오는 경우도 즐비하니까요. 어떻게 하면 조엄의 자세와 태도를 오늘날 되살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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