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문화교류 2-6
6. 통신사가 본 일본 문화와 풍속
무(武)보다는 문(文)을 소중히 받들어온 조선 학자가 통신사로 떠나면서 본 일본의 문화나 풍속은 어떤 게 있을까? 통신사 사신에 의하면 어떤 것은 부러움을 샀지만, 어떤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대. 통신사가 일본에서 본 것 중 부러워한 것 하나, 무시한 것 하나를 찬찬히 살펴볼게.
1719년 제술관으로 일본에 간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일본에서 본 부러운 점을 이렇게 썼어.
“중국이나 조선 책이 널리 퍼져있어 책을 사고 팔거나, 책을 내는 일이 썩 잘 되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 책 가운데 이황의 『퇴계집』에 대하여 관심이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읽는 사람도 가장 많고, 가장 존중되며, 일본 학자가 통신사절단을 찾아와 필담을 나눌 때 『퇴계집』의 내용에 대한 물음이나 퇴계의 후손에 대한 물음이 그 무엇보다 먼저 나온다.”
“나라 안의 책은 조선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백이라고 하면, 중국 남경으로부터 상인이 가져온 것은 천을 헤아린다. 서점에 나온 책이 조선에 견주어 열 배도 넘는다.”
“책방도 많고, 옛날 책과 새 책 가릴 것 없이 골고루 갖추고 있으며, 조선과 중국에서 이름난 사람들의 책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신유한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통신사가 오갈 때부터 출판 왕국인 셈이야. 일본의 에도시대는 ‘책의 융성’ 시대야. 사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출판문화는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 유럽에 견주어 썩 앞섰다고 볼 수 없어. 그런데 그런 일본이 어떻게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에도시대에 출판물이 넘쳐흐르는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첫째, 일본의 모방 본성이야. 일본은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모방하는데 무척 적극적이었대. 그 좋은 보기로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일본의 사절단을 들 수 있어. 즉, 견신라사, 견발해사처럼 우리나라로 보낸 사절단도 있고, 견수사, 견당사처럼 중국으로 보낸 사절단도 있지. 주로 유학생과 유학승처럼 우리나라나 중국의 앞선 문물을 따라잡기 위해 애썼거든. 그러니 우리나라나 중국의 역사나 문화, 정치와 경제 정보가 가득한 책이 필요했다는 거야. 그래서 일본은 진작부터 출판 또한 모방하였으므로 출판문화가 발달했다는 말인데, 뭐,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고대 일본도 고대 우리나라 못지않게 인쇄술이 발달하긴 했거든.
둘째, 시대적 배경이야.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맞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과 싸운 국제전이잖아. 그러니 동북아 삼국은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렀지.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통일을 둘러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끄는 서군이 서로 치열한 내전을 벌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가까스로 통일이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일본에서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학문과 예술, 문화를 꽃피우자는 시대적 배경과 요청이 있었다는 거지. 그런 흐름이 에도시대 일본을 출판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한 몫 했다고 보는 거야.
셋째,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이야. 에도시대는 일본 바쿠후가 나라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근 시대야. 섬나라 일본은 왕왕 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무역하거나, 다른 나라가 일본에 들러 무역하는데 익숙해. 그런데 도쿠가와 바쿠후가 들어선 이후로 일본은 조선을 빼고는 철저히 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지 않았어. 허용하더라도 나가사키의 한 곳을 지정한 것처럼 그 제한이 매우 엄격했지. 그러다 보니 일본인은 다른 나라의 역사나 세계관, 문화와 학문, 예술과 생활에 대해 호기심이 더 생겨서 출판 대국이 되었다는 얘기야.
앞에서 꼽은 이유는 대체로 외국과 관련된 관점에서 일본의 출판사정의 이유를 살펴본 입장이라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이번에는 일본의 내부적 관점에서 그 이유를 살펴볼게. 월간조선 2016년 12월호에 나온 기사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니 간추려 볼 테니 잘 봐.
‘하시구치 고노스케’란 일본인에 따르면 16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250년 남짓한 에도시대에 적어도 10만 종 이상의 신간 서적이 출판되었다고 해. 즉, 임진왜란과 내전의 전쟁 시대가 끝나고 평화 시대가 도래하자 상황이 반전된다는 거지. 그래서 17세기 중반 일본의 출판문화는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에는 연간 1,000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며 19세기에는 모든 국민이 책을 생활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 대국이 되었다는 거야.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을까? 그건 바로 성문화, 판권, 대여업 때문이라고 해. 1682년 오사카와 에도에서 발간된 ‘이하라 사이카쿠(1642~1693)’의 책이 그 발단이야. 성문화를 다룬 『호색일대남』이 그것인데, 그 책이 대박이 났거든. 따라서 일본인의 출판 관심이 폭발했다는 거지. 『호색일대남』은 ‘요노스케’라는 남자 주인공이 7세부터 60세에 이르는 54년간에 걸친 성 탐닉에 대한 이야기야. 그런데 그 표현방법, 묘사, 은유가 각 지역의 풍속과 서민의 희노애락, 생활상이 당시 언어로 생생하게 잘 담겨 있어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거지. 따라서 일본 전역에 『호색일대남』 열풍이 불어 출판이 발전했다는 거야.
이처럼 출판 대박이 일어나자 베스트셀러가 등장하고, 출판과 인쇄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전직 작가도 등장하게 돼. 연쇄적으로 산업이 발달하는 거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글을 배우려는 의욕도 높아져 사설 교육기관이 생기고, 19세기 초가 되면 문맹이 무척 낮아져 시골 아이조차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거야. 이런 배경에 힘입었으니 당시 책이 얼마나 소중해졌는지 감이 잡히지? 그러니 자연스레 책에 대한 판권도 그 가치가 올라가게 돼. 그래서 오늘날 지적소유권처럼 일본에서는 이미 그때부터 판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돼. 그러니 더더욱 출판 시장이 활기를 띠는 거야.
게다가 현대사회 이전이면 어느 나라건 비슷하듯 일본도 에도시대에 책값은 여전히 비싸. 그런데 시골의 아이조차 글을 알 지경이니 국민 누구나 책을 보고 싶어해. 그러니 어떻게 될까? 맞아! 대본업 즉, 오늘날로 치면 도서대여점이 성황을 이루는 거야. 그래서 출판문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는 얘기지.
이제 왜 일본이 에도시대부터 출판 왕국이 될 수 있었는지 감이 좀 잡히지? 하여튼, 휴대전화, 스마트폰이 만개한 요즘, 손전화기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얻는 것처럼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책에서 얻는 정보가 거의 절대적이잖아. 그러니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출판 왕국이라는 말은 그 사회가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하기도 해. 따라서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오가던 시대, 일본의 산업수준, 문화수준이 높다는 것을 인정해야지. 그러면 흔히 우리나라 학자 일부가 종종 주장하는 말 즉,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일본보다 뒤처졌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어. 일본도 심한 쇄국정책을 폈거늘…….
이번엔 통신사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본의 풍속을 하나 알아볼 거야. 조선 달력으로 1607년 6월 5일은 일본 달력으로는 5월 5일 단오야. 통신사는 에도에 있었는데 그때 이상한 행사를 본 거지. 부사 경섬이 쓴 『해사록』을 잠시 읽어볼게.
“초하루부터 남자가 있는 집은 집집마다 종이로 만든 깃발을 세워 싸움을 알리는 도구로 삼는다. 이날이 되면 먼저 그동안 용맹을 기른 아이를 모아 편을 나누어 싸움을 시킨다. 모인 아이는 서로 편을 갈라 마구잡이로 돌을 던지며 놀이를 벌이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씨름놀이와 같은 것이다. 오후에는 신분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창과 칼을 메거나 들고 시위를 벌인 다음, 수천 명씩 떼를 지어 진을 치고 마주본다. 그리고 나아가거나 물러서고, 앉거나 일어서며, 모이거나 흩어지고 유인하는 형세는 하나같이 전법에 따른 것이다. 편을 가른 뒤 저마다 잘 싸우는 사람을 내보내 칼싸움을 한다.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는데 서릿발 같은 칼날이 부딪쳐 불꽃을 튀긴다. 서로 앞 다투어 죽이고, 죽는 사람을 봐도 굳세게 나아간다. 싸움은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진다. 죽은 사람이 많게는 마흔 명에 이르렀다. 그밖에도 어깨가 잘리고 다리를 베어 상처를 입고 돌아온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싸움은 죽인 사람의 숫자로 승부가 정해진다. 칼을 맞아 죽은 사람도 몸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칼을 번갈아 쳐서 백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는다. 이를 ‘시검’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제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을 죽여 복수했다. 이날은 사람을 죽여도 죄가 아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원한을 품은 사람은 반드시 이날 보복한다. 일본 66주의 사람은 이날 곳곳에서 싸운다. 다만, 교토만 무늬 선반을 만들어 연극 놀이를 한다. 남녀가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잔치를 벌이다가 끝낸다고 한다. 마침 가까운 곳에서 이러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칼을 마구 휘둘러 피가 흘러넘쳐 언덕이 피로 물든 걸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때? 너무 끔찍한 일이지? 물론, 오늘날 일본에는 이런 일이 없어. 아무튼 통신사 접대를 맡은 일본 관리는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사신에게 보여주기 싫었는지 이렇게 말을 주고받았대.
“이날 일본에서는 으레 이런 놀이로 즐깁니다. 사신이 묵는 곳에서 가까우니, 만약 불편하시다면 금지하겠습니다.”
“나라의 풍속이라니 금지할 필요까지는 없소!”
통신사로 떠난 사신은 죄다 문(文)을 소중히 여기고 무(武)를 깔보는 사람으로 이뤄졌어. 그러니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알만하지? 『해사록』은 그런 일본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의 풍속은 사람을 잘 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많이 죽인 자는 비록 저잣거리의 천한 사람일지라도 그 이름이 드높다. 두려워서 피하는 사람은 비록 권세 있고 귀한 신분일지라도 온 나라 사람이 그를 버린다. 심지어는 친구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즐겨하는 풍속이 이와 같다.”
이런 일본의 풍속은 사신이 볼 때 한편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아주 불편했어. 왜냐하면 임진왜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이런 풍속, 다시 말해 칼의 힘으로 인정을 받는 사회 풍속은 조선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거든!
생각거리)
무를 숭상하는 일본의 풍속을 본 사신의 걱정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어요. 둘레 나라보다 경제력이 앞선 일본은 평화헌법까지 고치면서 재무장을 준비해요.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핑계 삼으며 차츰 미군과 공동 군사훈련을 자주 하고, 심지어 해외로까지 파병하면서 자위대의 힘을 기르는 것은 우리로서도 두려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시대 때 그랬던 것처럼 여차하면 군국주의의 길로 다시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사실, 일본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요?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고,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도 호시탐탐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노리고 있어요. 게다가 북한은 핵개발까지 마쳤으니 그 군사력이 만만치 않고요. 한반도를 둘러싼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을 일본에서 찾아보자고요. 현대 일본은 어떻게 해서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신유한이 본 오사카 풍경을 다시 떠올려봐야겠어요. 우리나라보다 책이 더 많았죠? 즉, 지식과 정보가 앞섰다는 거예요. 그리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층만 책을 보도록 한 반면, 일본은 평민까지도 누구나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러니 오늘날 일본이 세계의 강국이 된 것도 다 그런 뿌리에 힘입은 거지요. 모든 사람이 지식과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럼 우리는 앞으로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둘레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