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문화교류 2-7
7. 일본에서 주고받은 시와 글
통신사가 머문 곳에서는 으레 시와 글이 넘쳐났어. 통신사로 떠나는 사신 중에는 늘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포함돼 있었고, 아무래도 일본보다는 유학을 잘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도 많았대. 또, 일본에서도 조선 유교의 우수함을 인정한 터라 제대로 된 시와 글을 교류하려는 일본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어. 그러니 통신사의 인기가 높아서 가는 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지. 심지어 지배층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백성까지도 통신사의 글과 그림을 얻으려고 안달이 났다는 거야.
“자, 자! 통신사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쪽으로 줄을 서시오! 한 사람에 은자 세 냥씩이오!”
“아무튼 통신사가 오면 돈 버는 사람은 쓰시마뿐이라니깐요!”
“통신사를 만나게 해 주는 권리가 쓰시마에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소? 저 사람은 우리보다 늦게 왔는데도 돈을 더 냈다고 앞줄로 갔다는 거 아니요!”
“여보시오! 그런데 댁은 뭣 땜에 통신사가 쓴 글과 그림을 구하려고 이렇게 애태우는 거요?”
“허허, 아직도 그걸 모르시오? 통신사가 남긴 글이나 그림을 집안에 걸어두면 온갖 삿된 것을 물리쳐준다고 하지 않소? 특히, 세 사신이 쓴 글이나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요!”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도 통신사로 온 사람이 쓴 글이나 그림을 얼마나 받들어 모시는지 짐작이 가지? 그렇다면 통신사로 떠난 사신 일행은 일본에서 주로 어떤 사람과 만나 시와 글을 주고받았을까?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통신사가 온다고 하니 마땅히 우리 번의 유학자나 승려도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죠! 조선의 앞선 유학과 문화를 배우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 아니겠소? 한자로 쓴 한시를 주고받거나, 서화의 휘호(어떤 사람이 쓰거나 그린 글씨와 그림에다 다시 글씨나 그림을 더해 그 작품이 훨씬 더 빛나도록 해주기)를 청하거나, 글로써 말을 주고받는 필담을 통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평생에 한 번 뿐인 만큼 이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소? 퇴계학을 공부하면서 잘 몰랐던 것도 물어볼 것이고, 조선과 중국의 정치 정세와 문화, 백성의 풍습과 생활방식 따위도 질문할 작정이오!”
통신사가 일본으로 갔을 때 일본의 학자나 승려를 만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어. 사신은 조선의 뛰어난 유학과 문화를 일본에게 가르쳐준다는 자부심으로, 일본 사람은 조선의 앞선 학문과 문화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겸손함으로 서로 만났으므로 새벽까지 만남이 이루어지기 여사였지.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에 관하여 갖가지 기록을 도맡아하는 관리인으로 통신사 제술관이 있어. 제술관으로 1719년에 일본으로 떠난 신유한은 에도로 가다가 오사카에 머문 닷새 동안과 에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에 머문 닷새 동안 오사카의 문인과 시와 글로 묻고 답하는 시문증답을 하게 돼. 그때 신유한은 규슈의 구마모토에서 찾아온 서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것에 대하여 『해유록』에 이렇게 남겼어.
“오사카에 머문 닷새 동안 서생 십 수 명과 함께 저녁 늦도록 시간을 보냈다. 동자에게 먹을 갈도록 준비시켜 날마다 조금도 쉴 여유가 없었다. 서생이 저마다 성명과 자, 호를 써서 제출하는데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많고, 그 시 또한 졸렬해서 읽을 수가 없다. 단, 강약수와 지남명의 한시는 약간 운치가 있다. 그런데 어린 서생이 있었다. 나이는 열 넷인데 용모는 그림과 같다. 필담을 하면서 시어가 완성된다. 스스로 말하기를 성은 미즈타리, 이름은 야스나오. 집은 천 리 먼 곳이라 한다. 그 아비 헤이잔과 함께 왔다. 이 기회에 사관에서 재주를 평가받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동’이라 하자 그 아비는 크게 기뻐하며 자와 호를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미즈타리 씨란 부박연천의 뜻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호를 박연이라 하고, 안방이란 족도대방의 상이 있으므로 자를 사립이라 하면 어떤가?’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적어 주었다. 그 부자는 함께 머리 숙여 고마워했다. 그 뒤로 동자가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신유한에 따르면 오사카에 머물 때 구마모토에서 찾아온 호소가와 집안의 유학자 미즈타리 야스카다, 미즈타리 야스나오 부자를 만나게 돼. 그때 야스나오는 어린 나이지만 신유한에게 자기를 소개하고, 한시를 지어 올려 문장 재주가 뛰어남을 보여줘. 그것을 본 신유한은 신동이라 칭찬하면서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와 호까지 지어주었으니 신유한이 오사카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이 미즈타리 부자만큼 더 인상 깊었던 사람은 없는 듯해. 왜냐하면, 앞서 보듯 나머지 사람의 글은 형편없다고 비판하고 있으니까!
자, 이쯤에서 신유한처럼 통신사로 나선 사신이 일본 사람과 시문화답을 할 때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임했을까를 한 번 알아볼게. 다시 신유한의 『해유록』으로 가볼까?
“요즘 일본 사람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져 문장이 세련돼 졌으며, 학자를 학사대인이라 일컫고, 무리를 지어 따른다. 시를 청하고 글을 구하는 자가 거리를 메워 문을 닫을 지경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을 들은 뒤 우리의 뛰어난 학문을 알리는 것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제술관의 책임이다. 실로 그 일은 번잡하고 책임이 막중하다. 한편, 세 사신을 모시고 만 리 파도를 넘어 통역관의 무리와 함께 출입하며 행사를 주선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어서 사람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화살에 맞는 일을 피하듯이 이것을 기피한다.”
이 말에 따르면 제술관이나 통신사 사신은 일본에 앞선 유학을 가르친다는 사명감으로 떠났음을 알 수 있어. 하지만, 워낙 몰려오는 사람이 많은 통에 여간 힘들지 않음도 토로하고 있지. 이건 다른 사신도 마찬가지였어. 1719년에 통신사 서기로 떠난 김인겸(1707~1772)은 그때 나이가 쉰일곱이야. 당시 조선의 나이로는 아주 연세가 높은 분 곧 할아버지에 해당해. 오사카 숙소에서 김인겸이 얼마나 열심히 글을 많이 써 줬는지 『일동장유가』에 이렇게 남겼대.
“사력을 다해 질풍같이 붓을 휘두른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종이를 꺼내 놓는 바람에 쌓으면 턱에 닿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늙어 힘없는 내 근력을 다 써 버린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이삼백 리 떨어진 곳에서 식량을 메고 와 여기서 오륙 개월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니, 만일 글을 써 주지 않는다면 그 낙담은 얼마나 클 것인가? 날마다 시를 짓는데 닳아버린 붓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글과 그림을 얻으려 천리만리 마다 않고 와준 일본인에게 기꺼이 좋은 글과 그림을 내어주려는 사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엿볼 수 있지? 얼마나 많이 썼으면 붓이 닳아버릴 지경일까? 실제로 통신사 사신의 이런 활약에 대하여 일본인도 마찬가지로 기록을 해두었어. 1711년 10월에 통신사를 맞이한 아사히 시게아키(?~?)는 그의 일기 『앵무농중기』에 다음과 같이 썼대.
“통신사가 쓴 서화의 휘호를 구하기 위해 몰려든 일본 사람을 위해 잠도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끈기를 어떻게 칭송하랴 감탄했다. 사자관 이이방과 화원 박동진이 쓴 글과 그림을 손에 넣었다. 쇼우코우잉의 긴 복도를 밤새워 오가며 통신사를 지키는 바쿠후 관리로부터 주의를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얻어낸 것이다……. 지키는 관리가 쉰이나 되어 쉽게 끼어들지 못하다가 날이 밝아올 즈음에야 겨우 그림 넉 장을 얻었다. 해봉과 화암은 글에 능하여 많은 사람에게 글을 써 주었고, 죽리는 그림에 능하다.”
이런 글을 보니 통신사로 떠난 제술관이며 서기, 사자관과 화관의 일이 얼마나 소중하며, 얼마나 힘든지 알겠지?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일본 학자나 일본 사람이 조선 학문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고, 조선 학문을 배우고 싶어 했다는 것을 뜻하는 거야. 조선 말고는 뚜렷하게 학문과 문화를 나눌 나라가 없던 일본 학자로서는 마땅히 유학과 한문학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니 통신사가 묵는 숙소에는 통신사를 만나러 온 일본 사람으로 언제나 시장처럼 북적대기 일쑤였어. 게다가 밤잠을 마다하면서까지 글과 그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가히 모범이 될 만 했지. 오죽했으면 1764년 통신사 정사로 떠난 조엄은 『해사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을까?
“어떤 이는 조선 사람의 필적은 받아만 두어도 많은 이익이 되기 때문에 줄을 선다.”
“조선은 예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존경하여 그 나라 사람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그 필적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이 말에 따르면 일본 사람이 얼마나 조선 사람의 글씨와 그림을 귀하게 여겼는가를 단박에 알 수 있어. 이렇듯 일본 사람이 통신사의 글과 그림을 받기 위해 지나치게 열심인지라 그에 따른 부작용도 심해서 사건, 사고가 잇따랐어. 어떤 사건 • 사고가 있었을까?
1748년이야! 세토내해를 지나던 통신사 배를 향해 구경꾼 여럿이 작은 배를 타고 가까이 다가왔어. 그러다 그만 통신사가 탄 배 아래로 쏙 빨려 들게 됐지. 목숨이 위태로워진 거야. 그러나 정말 운 좋게도 이들은 조선 뱃사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어. 그런데 겨우 물에서 건져 올려 목숨을 살려놓았더니만 냅다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제발 글씨나 그림을 달라!’ 했다지 뭐야? 통신사의 글이나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지 상상이 가고도 남지? 더구나 카코군 오조에무라의 『어월견일기』란 책을 보면 그 사람들이 만두와 양갱까지 얻었다고 기뻐하는 모습도 담겨져 있어.
또, 1764년에도 작은 배로 통신사 배 가까이 다가왔다가 배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돛까지 내리고 구해준 적이 있대. 그랬더니 물에 빠진 일본 사람이 노 젓는 구멍을 붙들고 배 위로 올라와서는 ‘글씨를 써 달라!’고 애타게 매달린 적도 있어. 참, 못 말릴 일이다, 그지?
유학자뿐 아니라 평범한 백성까지도 이처럼 글씨와 그림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통신사 제술관이었던 신유한은 ‘문자가 겪는 아픔’이라며 안타까워했어. 그런데 왜 일본 사람은 그토록 통신사의 글씨와 그림을 얻으려 했을까? 그 답은 1719년 통신사 서기로 떠난 김인겸이 남긴 글을 통해 알 수 있어.
“학자가 아닌 어민이나 농민까지 조선 사람이 쓴 글씨와 그림을 얻으려는 까닭은 조선의 시문을 얻으면 집안이 편해지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여긴 탓이다!”
그러니 일본의 평민 사이에는 조선 통신사로 온 사람이 워낙 대단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쓴 글과 그림을 지니고 있으면 충분히 집안으로 들어오는 온갖 나쁘고 사악한 것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진 거지. 이 정도면 거의 광적이지?
한편, 다른 이유도 있어. 조선 사신은 일본을 유학을 못 하는 나라로 무조건 깔보는 경향이 있었거든. 적어도 학문과 문화는 조선이 일본보다 훨씬 낫다는 자부심도 대단했고. 그 때문에 사행길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사자관(글 쓰는 사람)이나 화원(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밤새 일본 사람에게 글을 써주거나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어. 조선 사신이 이렇듯 적극적으로 일본 사람에게 글을 써 주거나 그림을 그려준 것은 이들의 침략 근성, 야만성을 조선의 뛰어난 문화로 고쳐놓겠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야! 1636년 사행 때 부사 김세렴(1593~1646)이 쓴 『해사록』을 볼게.
“일본 사람은 한 마디의 말이나 몇 자의 글도 큰 보배로 여긴다. 뿐만 아니라 ‘효고’에서는 벽에 쓴 시 두 폭의 값이 하나에 1백 냥이고, 부사가 쓴 산율시 8수는 온 나라 안이 베끼었다. 이는 그 사람이 참으로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번 지극한 보배라 하면 온 나라 안이 몰려드니 그 또한 한번 웃을 만하다.”
일본에서 인기가 이렇듯 높으니 통신사 사신이 유교문화가 앞선데 대한 우월감이 얼마나 강한지 안 봐도 빤해. 그렇다 보니 때로는 조선을 잘 아는 일본 유학자와 관계를 틀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기도 했어.
“하야시 라잔은 일본을 대표하는 유학자입니다. 이미 23세 때 사명대사 유정을 만나 그 뛰어남을 인정받기도 했답니다. 하야시 라잔은 조선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여러 방면을 두루 공부한 유학자이자 외교관이라 합니다. 그래 한 번 만나보니 어떻습니까?”
“그는 조선에서 낮게 취급하는 풍습이나 과학 이야기만 물어오니 일본 유학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문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봐야지요!”
이런 평가는 훗날 일본 유학의 수준을 통신사 사신이 지나치게 가볍게 보았다고 비판할 때 종종 나타나는 대목이야. 사실, 하야시 라잔은 학문이 높아서 조선의 사신 중에도 높이 평가한 사람이 있거든. 그리고 웃기는 것은 통신사 사신 중 하야시 라잔을 비판한 사람조차 정작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거야. 대체 어느 말이 옳은지 모르겠어!
“일본 유학자의 수준이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러니 시문을 주고받을 때 막연한 우월감, 무조건적인 무시는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 서로 소통하면서 상대 나라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취하고 불필요한 것은 버리는 자세가 필요한데, 무조건 좋다거나, 무조건 나쁘다고 해버리면 얻을 게 없잖아? 아무튼, 이에 대하여 일본인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나카이 지쿠젠이 쓴 『소보키겐』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와.
“통신사와 만나는 일본 학자의 수준이 워낙 떨어져 일본이 통신사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여 대단히 수치스럽다!”
“학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떼를 지어 몰려와 통신사더러 글을 써 달라고 하니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심지어 잠을 며칠이나 못 잔 통신사 관리가 울면서 ‘그만 쓰고 잠 좀 자자!’고 하소연했다!”
이 글을 보면 조선 사신이 일본을 무시하는 말이 언뜻 옳은 것처럼 보여. 허나,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통신사가 에도에서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한 뒤 숙소에서 머물던 때야. 통신사 사신을 찾아온 오노다(?~?)라는 일본 사람은 그 전에 온 통신사 제술관과 서기가 써 준 시문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어. 이런 대목은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봐야 할 거야.
“이 모두가 적당히 써 준 것으로 하나라도 평가할 만한 것이 없다. 아무리 문장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이 땅에 와서 써 준 시문이 이 정도로 서투르다면, 시를 짓는 양을 줄여야 한다.”
오노다는 글에 관하여 나름 조예가 깊었나 봐. 사실, 그의 평가가 무리는 아니라고 봐. 제 아무리 글과 그림에 빼어난 재주를 지녔다 하더라도 쉬는 시간 없이 계속 밀려오는 사람에게 글을 써주거나 그림을 그린다면 차츰 그 질이 떨어질 것은 빤하잖아. 그냥 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쓰거나 그려도 질이 떨어질 판인데, 글과 그림을 상황과 사람에 맞춰 창작해야 하니 그 사정이 충분히 헤아려지지? 그러니 오노다의 비판은 우리가 달게 받아야 할 거야.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통신사가 남긴 시와 글은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았어. 그래서 글과 시문, 그림과 예능에 뛰어난 사람을 더 많이 보내 달라는 일본의 요청도 있었던 거야. 조선도 일본의 그런 요구에 응하여 1682년 통신사부터는 문서 일을 맡아 하는 제술관이 더 가게 된 거지. 사실 조선으로서도 일본에 보낼 제술관이며, 서기는 학문에 뛰어난 학자를 보냄으로써 은근히 조선 학문의 힘을 뽐내고 싶었거든. 그러니 학문에 뛰어난 두 나라 학자가 자연스럽게 통신사가 묵는 숙소에서 만남을 가졌으니 통신사가 일본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면은 확실히 크다 할 거야. 이처럼 멋진 문화사절단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일본 백성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요, 즐거움 아니겠어?
생각거리)
통신사가 학문에 뛰어나 일본에 좋은 영향을 끼친 건 바람직한 일이에요. 그런데 통신사로 떠난 사신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통신사 일행 중 다수가 조선에서부터 일본을 업신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런 자세는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갖도록 하는데 썩 바람직하지 못해요. 왜, 우리도 흔히 어떤 친구를 두고 선입견에 빠지면 다음과 같은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기도 하잖아요. “보나 마나 그 애는 지금 자고 있거나 게임하고 있을 거다!” 사실 보지도 않은 그 친구가 해당 시간에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지, 공부하고 있는지, 심부름하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말에요. 그러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익히려면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언제나 겸손하게 열린 자세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해요. 그런데 다른 나라의 문화와 풍속을 그릇되게 받아들이는 것은 오늘날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단지 다를 뿐인데 왜 우리는 종종 틀리다고 생각할까요? 이는, 현대인도 알게 모르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선악처럼 이중적인 잣대로만 재단하면서 그에 따라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죠? 자, 그럼 그런 보기를 찾아 서로 토론해볼까요. 좀 어려운 보기를 몇 개 던질 테니 이야기를 솔직히 나눠 보세요. 실제로 우리 마을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가정하고 생각한 뒤 토론하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우리 동네에 이슬람 사원이 들어선다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 마을에 장례식장이 들어선다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사는 지역 근처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사는 곳 부근에 장애인학교가 들어서면 어떻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