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사건사고 1-8
8. 빙례 외교 갈등을 풀어라!
통신사가 일본을 오갈 때 언제나 잘 다녀온 건 아니었어. 때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행도 있었거든.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1711년 사행이지! 그때는 조선과 일본 모두 새로운 사정이 생겨 피할 수 없는 갈등이 빚어지게 돼.
먼저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볼게.
“전하! 요즘 들어 동래 왜관에 사는 왜인이 제 멋대로 설치고 다녀 동래부사가 어려움을 호소해 왔습니다. 1707년에는 동래 왜관에 사는 쓰시마 남자와 조선 여인이 정을 통한 일이 생겼고, 이 일 말고도 쓰시마 사람이 종종 민가로 들어와 여인을 욕보이는 일이 잦다 합니다. 그래서 지난 1710년에는 왜관 가까운 곳에 있는 민가를 모조리 멀리 옮겨버렸다 합니다! 그러니 일본으로 갈 사신은 왜인이 다시는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쓰시마와 분명히 약조를 맺어야 합니다.”
1711년 숙종(1661~1720) 임금님은 통신사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 사람이 조선 땅에서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꼭 약조를 맺어오라!’고 신신당부했대. 임금까지 나서서 이렇게 말한 데는 다 까닭이 있어. 그때 쓰시마는 조선이 중국과 무역할 때 필요한 은을 대주고 있었으므로 서서히 콧대가 높아져 제 멋대로 설치고 있었거든. 그러니 통신사의 임무가 특히 더 막중해졌어.
한편, 그즈음 일본도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기고 있었거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1709년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1646~1709)가 죽고 6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노부(1709~1712)가 새로 쇼군이 되었어. 이에노부는 어려운 재정 위기를 벗어나고, 경제 안정을 바라는 민심을 다독여야 하는 숙제를 안고 출발했는데, 그 숙제를 풀 사람으로 아라이 하쿠세키를 내세웠지. 하쿠세키는 개혁을 통해 자기 뜻을 펼치려 했는데, 통신사를 접대하는 ‘빙례’ 문제도 개혁대상 가운데 하나였어.
“쇼군 전하! 바쿠후가 그 동안 통신사를 7번이나 초빙하면서 그 접대가 차츰 눈부시게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바쿠후 재정에 큰 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씀씀이를 크게 줄여야 할 줄 믿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그렇게 되면 조선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그것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통신사가 오갈 때 서로 지키는 예의법도인 빙례를 고치면 됩니다. 그 원칙으로 ‘화평, 간소, 대등’을 내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로 화평하게 지내려면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과 일본 관계를 볼 때 결코 대등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조선에서 온 통신사를 교토의 일왕이 보낸 칙사보다 더 정중히 모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보내는 사신은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까지 가지도 못하는데 비해 조선에서 보내는 통신사는 일본의 도읍지인 에도까지 오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빙례를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언뜻 들으면 설득력 있지? 그런데 정작 하쿠세키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어. 하쿠세키는 조선과 일본의 국제 지위를 따져볼 때 일본이 조선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거든. 그래서 하쿠세키는 통신사를 초빙해 모시는데 필요한 예의와 의식, 그 절차 따위를 바꾸는 빙례개변 즉,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빙례개혁을 강력히 주장한 거야! 이렇듯 두 나라의 사정이 다르니 분명 1711년 사행은 쉽지 않아 보여! 아니나 다를까 1711년 2월 20일 통신사가 떠나기도 전부터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일본에서 날아왔어.
“전하! 일본 사신이 말하기를 쇼군의 아들인 ‘약군’에게 주는 예단은 물론이고, 예조에서 바쿠후의 관리에게 보내는 서계와 예단도 빼라 합니다. 그 이유는 바쿠후의 고관이 자기보다 관직이 낮은 예조참판의 서계나 예단을 받는 것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라 하옵니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대체 예물을 보내라는 말이오, 보내지 말라는 말이오?”
“전하! 두 나라 사이의 일을 느닷없이 제 맘대로 바꾸겠다는 것은 엄청난 외교적 결례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조차 직급이 낮은 하급관리를 동래로 보내 문서도 아닌 입으로 전했으니 이는 우리 조선을 업신여기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전하! 일본의 속셈이 어디에 있건 일본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조선 외교의 뿌리입니다. 이는 섬나라 오랑캐는 잘 타일러 예로써 이끌어야 함을 뜻합니다. 일본이 하는 짓이 예에 어긋난 것임은 틀림없으나 오랑캐 무리란 본디 그런 것이니 그냥 일본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 나을 성싶습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약군과 바쿠후 고관에게 예물과 서한을 보내지 않기로 했어. 그러니 조선과 일본의 외교 싸움 일차전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거지.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기선 제압을 한 셈이야.
그렇게 한 바탕 난리를 친 다음 통신사가 한양을 떠나 일본으로 가려고 부산에서 기다리던 5월 25일이야. 쓰시마에서 또 다시 골칫거리를 안고 왔어.
“바쿠후가 쇼군의 호칭을 ‘국왕’으로 바꾸려 하니 조선국서도 이렇게 바꾸었으면 합니다.”
조선 조정은 다시 이 문제로 시끌벅적했어.
“전하! 일본 사신이 앞으로 일본 쇼군을 일컬을 때 ‘일본국왕’이라 해 달라 합니다!”
“어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지금까지 ‘일본국대군’으로 실컷 써오지 않았소? 대군으로 부른 지가 인조 때인 1635년부터 지금까지 77년인데 갑자기 호칭을 바꾸자는 것은 예단을 물리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 아니겠소?”
“전하!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쇼군을 일컬어 국왕이라 한 적이 이미 조선 초기에 있사옵니다. 무로마치 바쿠후에게 보낸 국서에 일본국왕이라 한 게 그 좋은 보기입니다. 게다가 섬나라 오랑캐란 무릇 들짐승과 같은 것이라 이런 요청을 물리치는 것은 섬 오랑캐와 사이좋게 지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설령 우리가 쇼군을 두고 일본국왕이라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잃을 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랑캐가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뭐, 사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교토에 살면서 형식만 왕인 일왕과 달리 실질적으로 왕 노릇을 하는 쇼군이니 말이야. 하지만 하쿠세키가 이렇게 요구한 것은 다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었어! 생각해 봐. 조선에서 ‘대군’이라 함은 임금의 형제를 일컫는 말이잖아? 그러니 쇼군을 두고 일본국대군이라 하게 되면 쇼군은 기껏해야 조선 임금의 형제에 그치게 되잖아? 다시 말해 일본 쇼군은 조선 임금보다 낮은 사람이 되는 셈이지. 그래서 하쿠세키는 일본 쇼군을 조선에서 ‘국왕’으로 불러야 서로 격이 맞아 떨어진다고 주장한 거야. 이 또한 언뜻 들으면 하쿠세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지?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주장에는 하쿠세키의 노련한 외교 솜씨가 숨어있는 거야. 만약, 하쿠세키의 말대로 된다고 쳐.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보다 높은 나라가 되는 거지. 왜냐고? 왜냐하면 일본에는 힘이 있건, 없건 간에 쇼군 위에 천황이라고 하는 일본 왕이 있잖아. 그러므로 쇼군을 일컬어 국왕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저절로 조선보다 높은 나라가 되는 셈이지! 천황은 말 그대로 왕 위의 왕, 황제가 되는 것이니 말이야. 조선에는 왕 위에 아무도 없어. 그렇다고 황제를 칭할 수 없고. 그러다간 중국이 가만 있지 않을 테니 말이야! 어때? 간사하고 얄미운 사람이나 정말로 노련한 하쿠세키지? 왠지 모르게 배알이 틀리는 걸 보면 이번 싸움도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느낌이야. 연거푸 조선에게 주먹을 던져 성공시킨 거지.
아무튼, 그 문제도 일본의 요구대로 다 하기로 수용한 다음 드디어 통신사가 부산을 떠나 쓰시마로 갔어. 그런데 쓰시마에서 8월 1일 다시 빙례개변을 알리는 내용이 도착해.
“통신사가 도착하면 통신사를 위한 환영 위로잔치인 연례는 다섯 곳에서만 하는데, 연례에 앉을 때 사신은 쓰시마 영주와 마주 앉으며, 바쿠후의 문위사는 쓰시마 영주보다 상석에 앉고, 사신은 문위사를 뜰에 내려가 맞아야 합니다.”
삼사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앞선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니 바쿠후 문위사는 뜰이 아니라 기둥 밖에서 맞이했거든. 그리고 앉는 자리도 상석이 아니고. 따라서 앞선 사례가 그렇지 않은데, 무턱대고 그 연례를 바꿀 순 없다고 답장을 보내.
그나저나 일본은 왜 이런 요구를 느닷없이 하는 걸까?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말이야. 외교란 것이 대개는 미리 상대국에 알리는 법이거든. 즉, 아국에 이번에 이런저런 이유가 생겨서 기존에 하던 걸 바꾸려 하는데, 귀국의 양해를 구한다거나 혹은 귀국의 의견을 듣고 싶다거나 하면서 조심스레 접근하지, 그리고 이견이 생기면 서로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아내고 말이야.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번에는 일본이 이처럼 그냥 툭툭 일방적으로 던지는 식이거든.
“하쿠세키님! 하쿠세키님이 짐작한 대로 조선에서 쇼군 호칭에서부터 약군과 고관에게 보낼 예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우리가 요구한 대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내 그렇게 될 거라 진즉에 말하지 않았소!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될 노릇이오! 더 몰아쳐야 하오! 그래서 철저히 조선 통신사의 지위를 떨어뜨리고, 일본 바쿠후의 권위를 하늘 높이 드높여야 할 것이오! 그러니 다음 단계의 일도 빈틈없이 밀어붙이도록 하시오!”
“하이!”
하쿠세키는 귀신도 탄복할 만큼 조선의 의례를 꼼꼼히 연구했어. 그리고는 자기가 주장하는 빙례개변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썼지! 연거푸 날아오는 일본의 주먹을 맞이한 조선 사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앞선 사례를 어기는 것은 따를 수 없소!”
이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조선의 통신사 삼사가 단호하게 나서자 이 논의는 제 자리만 뱅뱅 돌게 돼. 쓰시마는 제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이번에는 세 사신을 협박했어. 그러나 세 사신은 조금도 굴함이 없이 떳떳하게 맞섰지.
“조선에서 자꾸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는 일이 생길 텐데 그래도 우길 참이오?”
“아니, 우기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통신사가 오가는 길에 행하는 모든 빙례는 1682년 사행을 기준으로 한 『절목강정』에 따라 하기로 돼 있지 않소? 그런데 그 모든 걸 갑자기 바꾸라니 그 무슨 해괴한 짓거리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앞으로 쓰시마와는 머리를 맞대지 않고 바쿠후에서 오는 쇼군 위문사와 모든 일정을 정하겠으니 쓰시마는 잠자코 있으시오!”
어때? 이 정도면 이 건은 조선의 승리라 해도 괜찮겠지?
이어, 9월 18일 오사카에서 다시 빙례개변 문제로 조선 역관과 쓰시마 수행원 사이에 밤새도록 말다툼이 벌어졌어. 그때도 쓰시마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아울러 쓰시마 영주와 조선과의 외교적 책임을 맡은 쓰시마의 두 장로도 삼사에게 빙례개변을 계속 권했어.
“삼사 어른! 쇼군의 대접이 앞선 사행 때와 달리 훨씬 더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이 또한 앞선 사례에 얽매이지 않고 하다 보니 이루어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삼사 어른도 더 이상 앞선 사례만 고집하지 말고, 우리가 권하는 빙례개변을 받아들이시지요!”
“그건 아니 될 말이요! 어찌 서로 합의된 예를 갑자기 깨뜨리고 새로운 예를 만든다는 말이오?”
“아니, 정말 끝까지 이럴 겁니까? 자꾸 이렇게 나오면 조선과 일본의 화친이 깨질 지도 모르는데요! 그럼 그 책임을 삼사가 다 질 수 있습니까?”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조정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응할 수 없소!”
일본의 끈질긴 협박과 꼬드김에도 삼사가 흔들리지 않은 걸 보면 이번 건 역시 조선의 승리라 할 수 있어.
이어 9월 22일이야. 빙례개변 문제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자 쓰시마는 예에 관하여 논한 책인 『예경』과 1471년(성종 2)에 신숙주(1417~1475)가 펴낸 책으로 일본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실린 「해동제국기」까지 들먹였어. 한 술 더 떠 사소한 예법을 문제 삼는 것은 일본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대들었지. 심지어 쓰시마의 가신 중 한 사람은 사신이 보는 앞에서 칼을 뽑아 세 번이나 닦으며 위협했대. 그러자 삼사도 그런 위협에 눌려 잠시 머리를 맞댄 뒤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해.
“만약 끝까지 앞선 사례를 고집한다면 반드시 난처한 일이 생길 것이다. ‘더 이상의 요구는 없다.’는 쓰시마의 다짐을 받은 뒤 역관을 보내어 잘 처리하도록 하자.”
이로써 빙례개변의 문제를 둘러싼 외교 싸움은 일본이 뜻하던 대로 다 이루어지게 되었어. 그러니 빙례를 둘러싼 싸움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고 만 거지.
그런데 이런 빙례개변이 왜 문제가 된 것일까? 불평등한 조항이 있다면 사실 평등하게 바꾸는 게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다음 내용을 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나게 돼.
“객관 위문은 바쿠후 의식을 관장하는 관리를 보낸다, 쇼군을 만날 때 국서는 정사가 가지고 들어간다, 빙례 때 쇼군의 세 종친은 사신과 동석하지 않는다, 향연에 쇼군의 세 종친은 참석하지 않는다.”
이 내용을 보면 이전에는 이렇게 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지? 그러니 이 내용은 겉으로만 보면 두 나라의 관직 지위에 맞게 통신사 접대를 하자는 것이니 일본의 요구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어. 그때 일본에서는 천황이 칙사를 바쿠후로 보내면 바쿠후에서는 다이묘 급의 관리가 접대를 맡았거든. 그런데 통신사를 맞이하는 것은 이와 달리 바쿠후의 고급 관리가 맡아야 하고, 통신사를 맞이하는 잔치에는 쇼군의 세 종친까지 죄다 나와야 했어. 그러니 이것은 대등하지 않으므로 천황의 칙사 수준으로 통신사 지위를 낮추자는 거야. 사실, 일본 내에서도 그런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어. 허나, 하쿠세키가 모든 논쟁을 다 끝장내고 주도권을 쥐게 된 거지.
언제나 역사를 살펴보면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실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법이야. 하쿠세키의 숨은 속셈은 단순히 양국 관계의 대등한 관계 유지가 아니었거든. 하쿠세키는 비록 겉으로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서로 평등하지 않은 것을 고치자고 주장했으나 숨은 뜻은 그게 아니야. 즉, 하쿠세키는 철저하게 통신사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자연스레 일본 바쿠후의 권위를 드높이려고 했어. 그러니 찬찬히 잘 생각해봐. 지금껏 늘 상석에 앉은 사람보고 갑자기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하면 누가 기분 좋겠어? 하쿠세키는 그런 감정까지도 놓치지 않고 다 고려한 거지. 그래서 지금까지 벌어진 조선과 일본의 외교 전투는 하쿠세키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으니 조선이 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통신사 빙례를 둘러싼 외교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통신사가 조선 임금의 국서를 일본 쇼군에게 전달한 뒤인 11월 11일 쇼군의 답서를 받으면서 다시 불붙게 되었어.
“쇼군의 답서에 우리 중종(1488~1544) 임금님의 휘인 ‘역’자를 쓰고 있지 않소? 아니, 이렇게 못 돼 먹은 답서가 어디 있단 말이오?”
“어디 한 번 보겠습니다. 어허! 이런 고약한 노릇이 있나! 죽은 사람의 휘나 임금의 휘를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것이거늘! 쯧쯧쯧, 이러니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안 되겠소! 이번에는 단단히 따져야지, 이대로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겠소!”
정사와 부사, 종사관 삼사는 화가 많이 났어. 왜냐하면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유학의 영향을 받는 나라에서는 임금님의 생존 당시의 이름인 휘를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돼 있거든. 특히, 공문서는 더더욱 그렇지. 그래서 이런 국서를 작성할 때는 작성자가 여간 마음을 써야 하는 게 아니거든. 이런 문화는 서양과는 꽤 다른 문화라 할 수 있어. 서양에서는 어른이나 선조의 이름을 그대로 본뜨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 또, 그런 걸 자랑스러워하고.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일본도 서양처럼 부모나 쇼군의 이름을 쓰게 되는 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여겼거든. 쇼군의 이름 가운데 한 자를 얻는 것은 다이묘 외에는 거의 이어받을 수 없었어. 그러니 쇼군의 이름을 쓰게 되는 것은 집안의 더없는 영광이라 할 수 있지.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고 강변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왜 이전에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우연의 일치인가? 어쩌면 조선에서 휘를 함부로 쓰는 문제가 심각한 줄 알고서 일부러 그런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 일본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왜냐하면 쇼군의 답서에 조선 임금의 이름을 쓴 문제를 사신이 일본에 따지자 일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되받아쳤거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조선에서 보낸 국서를 잘 보시오! 일본 쇼군의 휘인 ‘광’자를 쓰지 않았소? 그럼 피장파장이 된 셈 아니겠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요? 그때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트집을 잡는 게 어디 있소? 아무튼 이대로는 조선에 돌아갈 수 없으니 빨리 국서를 고쳐 주시오!”
“아니 우리가 조선의 신하요? 이래라저래라 하게! 좋소! 그렇다면 조선이 보낸 국서부터 고쳐 다시 보내시오! 그러면 우리도 고쳐 보내도록 하겠소!”
답서를 고쳐달라고 요구하던 삼사는 도리어 조선 국서를 먼저 고쳐달라는 일본의 주장에 휘말리고 말았어. 그러니 이번 사행의 외교전은 철저하게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고 봐야 해. 좀 씁쓸하지?
우여곡절 끝에 통신사는 임무를 마치고 1712년 3월 9일 일본에서 돌아왔어. 그 어려운 사행을 마친 삼사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정사와 부사, 종사관 삼사는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 관직을 다 빼앗겼음은 물론이고, 문중에서 쫓겨나는 벌까지 받았지. 외교의 주도권을 빼앗긴 모든 책임이 통신사 삼사에게 있다 하여 그렇게 한 거야!
생각거리)
일본의 하쿠세키는 조선의 사신을 철저히 공략해 값진 외교적 승리를 이끌어 냈죠. 반면, 조선의 세 사신은 그에 맞서 저항은 했으나 명분에서 밀리고 말지요. 왜냐하면 일본의 철저한 분석과 연구에 미칠 만큼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못했으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 조선은 일본을 바라볼 때 늘 오랑캐라는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해요. 그저 오랑캐라고 무시만 하니까 되레 일본에게 일격을 호되게 당한 거지요. 이처럼 선입견이나 편견은 개인을 떠나 나라 전체의 이익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라 하겠어요. 어떤 일을 할 때 무의미한 명분이나 선입견, 편견에 따라 그걸 지키려다 도리어 손해를 보는 일도 많으니까요. 자기 둘레를 둘러보세요. 일본이 무조건 나쁘다는 사람도 있고, 일본은 무조건 좋다는 사람도 있죠? 그러면 우리가 일본을 바르게 볼 수 없겠죠? 자, 그럼 우리가 일본이나 다른 나라를 바르게 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자기가 겪은 한일갈등의 사례를 떠올리면서 생각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