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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찌니 Nov 26. 2023

 자존감 없는 자존심은 말이지

말이 안 되는 전제였다.. 

수년 전 멘탈이 파사삭 바스러진 적이 있었다.

분명 당시의 난 회사의 설립 멤버였고 나름 직원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상사였고 가정에도 충실한 슈퍼워킹맘이었다. 나의 하루는 늘 열심히 살아낸 치열함의 흔적들이 가득했고 몸의 피로는 그것을 반증하는 듯했다.

그렇게 하루를 48시간처럼 살며 애정을 가지고 매 순간을 살아왔다. 그게 당연했고 그게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듯했다. 그것이 문제인 줄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만 살아오며 수년을 나의 가치는 내 명함으로, 나의 역할로, 내 일의 결과물로 이야기해 왔다.

'00의 누구입니다', 'XX프로젝트 담당 누구입니다.', '00의 총괄팀장 누구입니다'..

일의 결과는 자존심이었고 일은 곧 내 얼굴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적어도 그때는 그것이 나에겐 정답이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곪아 가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시간이 흘렀고 답답함이 생기기라도 하면 내 일에 대한 나의 열정과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가며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터져버렸다


자존심을 잘 지키며 잘 살아왔다 생각했다.

나의 코어는 자존심이니 그게 무너지지 않으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문득 자존심이 상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가 어그러지는 느낌이 견딜 수없이 힘들어졌다. 모두가 나를 공격하는 것 같고 칭찬의 말도 나를 향한 비난을 돌려 놀려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차츰 나는 무너져 내려갔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노라 자신했는데 그 곳에 정작 은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문득 마주한 내 얼굴은 생기도 활기도 없는 좀비의 죽은 눈빛과도 같았다.

그 얼굴 어디에서도 이전과 같은 생기와 자신감은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잡고 있는 끈이라곤 알량한 '자존심'인 듯했다. 그것마저 놓으면 끝날 것 같은 눈빛으로 고집스럽게 자존심이 무너지는 상황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렇게 알량했던 자존심은 사라져갔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잃어버린 감정은, 내가 다시 찾아야 하는 감정은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2021년의 겨울이 찾아왔다.

난 회사를 관두고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깊은 심연도 지나 지구 반대편까지  뚫릴 기세였다. 잡아야 했다. 절실하게 건져내고 싶었다.

 내 스스로를 구하고 싶은 마음, 그 감정에서부터 시작이었다.


 2022년 1월 1일.

나를 사랑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차츰 내게 나있었던 구멍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그간 자존심이라 불렀던 것은 그 순간부터 별것이 아니게 되었다. 별스럽지 않은 의미가 되었고 더 이상 내게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찌를 듯이 날카롭던 말들도 그들의 언어로 해석되어 그 의미만이 전달되었다. 그들의 상처는 더 이상 내게 흉기가 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상황, 같은 목소리, 같은 톤으로 전달되는 같은 말들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순간부터 조금씩 단단해져 감을 느끼게 되었다.

알량했던 '자존심'은 '자존감'이 되어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갔다.







요즘은 넷플릭스에서도 티브이채널에서도 심심찮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때마다 자존감이라는 말을 항상 같이 듣곤 하는데 그 해석이 참 천차만별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그 뜻을 달리하기 어려운 두 단어를 부득불 달리 명명하며 그 의미를 각각 재부여한 데는 각자의 위로가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Self-esteem, 자존심 혹은 자존감.

영어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두 단어를 어렵지 않게 혼용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유달리 그 두 단어가 하나이기 힘들까. 한국이라는 사회적 정서상 양보가 미덕이고 나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배우며 이렇게 살아가는게 숨쉬듯 자연스럽게 삶의 곳곳에 녹아 있다. 우리가 살아온 환경과 상황들이 언제나 '나'를 뒷전에 두는 상황들이 쌓여 쉽게 둘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후회 없이 살거라 당당하게 외치며 끝없이 앞만 보며 경주마처럼 달려온 지난 시간들 속에 나 또한 병들었고 그 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고칠 수 있는 것이었음을 겪고 보니 정답이 없는 것이 살아가는 것임을 배운다.


어제의 내가 겪고 배운 감정들에 오늘의 내가 새로운 결정을 더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살아냄'이고, 내일의 나는 또 오늘을 잘 살아냄이 모여 만들어질 테니까.

 

혹자는 말한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이라 하기도 하고 '자기존중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존중하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스스로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마주한 '자존감'은 '자아존재감'에 더 가까웠다.

분명 존재하나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어린아이가 서서히 자라나듯 그렇게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한 '자아존재감'은 각자의 방식대로 개성 있고 멋지게 성장해 간다. 지금 나의 '자존감'은 잠시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듯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그 또한 지날 것이다.

그리고 난 믿는다.

나의 그 녀석은 꽤나 멋지게 잘 이겨내고 멋지게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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