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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찌니 Dec 02. 2023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후회할 말들을 쏟아내기

어릴 때부터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딜 가든 펜과 노트는 늘 함께였고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소리들은 글로 노트를 빼곡히 채워갔다.


그렇게 난 '조용한 수다쟁이'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쓰는 것을 멈춘 것이 기록의 무서움을 마주 하고였다. 기록해 둔 순간 그것은 그대로 그곳에 묶여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공공의 것이 되었다.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내 글이 더 이상 나의 말이 아닌 타인의 말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


우연히 먼지 쌓인 상자에서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초등 2학년 때였던가 3학년때였던가 이젠 연도를 보아도 계산이 바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렸던 그 옛날, 내 안의 수다쟁이가 쏟아낸 수많은 고민과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일기장을 보니 난 그 시절부터 이미 완성형 수다쟁이였다.

한 페이지가 부족해 두장 세장씩 적어 내려간 일기를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작은 소녀와 마주한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상상이 넘치는 진정한 그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긴 수필집 같은 일기장은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상상하며 함께하고 꿈꾸게 했다. 그것은 어린 날의 내 목소리를 글로 담아낸 것이기에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그 감정들을 몸은 성인이 된 지금의 나에게는 생생한 감정 그대로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먼지 쌓인 시간들을 뒤로 거슬러 가다 보니 어느덧 강력했던 사춘기 시절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글은 끊어지고 더 이상 공감하지 못하는 타인의 목소리만 남아 있었다. 자라는 과정 속에 나를 강하게  성장시키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서 타인의 색을 내 것인 양 그대로 입히고 타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 척 잰채하다보니 어느새 글은 뒤죽박죽 어떤 것에도 닿지 않고 있었다.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말들은 결코 타인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조용한 수다쟁이는 그저 조용한 사람이  되어 말없이 묵묵히 제 할 일만을 미친 듯이 집중해서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쌓인 침묵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날카로운 말로 내 목소리를 통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안의 수다쟁이가 다시 부활했음을 느꼈다. 글이 타인을 모방하면서 더 이상 소리 내지 못하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공격적인 방향으로 뾰족하게 날을 세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날의 엉뚱 발랄했던 상상력은 집요한 집착과 인과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바뀌어 세상 비판적인 백여 가지의 안 되는 이유들을 상상하고 만들어냈다.


기록하려 해도 어디서 어디까지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나니 후회할 때 하더라도 후회할 것들을 끄집어내고 속아내는 과정이 필요해졌다. 지금은 후회할 말들을 끄집어내서 기록으로 남기고 그 속에 진정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재해석하며 내 안의 '조용한 수다쟁이'를 다시 마주한다. 쓰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은 그 아이가 보내는 신호이니 마음껏 재잘거리게 두고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게 보듬어주고 들어주면 조금씩 달라지겠지.


요즘은 한 줄  한마디를 쓰는데도 수십 번씩 저장했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아마도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에 익숙해진 내가 계속 검수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굳이  이런 자기반성과도 같은 일기장에나 쓸 말들을 굳이 기록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아직도 십 대의 어디 즈음에서 소리가 잠겨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어린아이를 위해서다. 그와 같은 마음을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며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내게는 치유의 과정이며 반성과 훈련의 과정이기도 한 기록훈련은 훗날  잃어버렸던 내 목소리를 다시 만날 수 있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부끄럽지만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은 그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그 결과는 앞으로의 내가 잘 감당할 수 있게 단단하게 그리고 조금은 친절하게 들여다보고 응원해주려 한다.


다양하게 사물을 비틀어보고 기록을 남긴다.

다양하게 사람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의미를 재해석해본다.

다양하게 상황들을 상상해 보고 결과들을 지켜본다.

시간은 걸리지만 그 과정 속에 조금씩 긍정적인 힘이 자라나는 게 느껴진다. 내 안의 아이가 이제 곧 사춘기에 접어들 것 같은 불안감도 몰려오지만 그 또한 겪어내면 못할 것이 없기에 괜찮다 다독여본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며 한발 뒤로 물러나 기다린다.


그렇게 다시금 엉뚱한 상상력이 닿는 길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는 연습을 해본다.

그리고 그 길에 수많은 시행착오로 인한 흉터 같은 후회들이 깔리겠지만 오늘도 후회할 것들을 기록하며 내일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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