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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집 구하기(2) 희망고문 편

뉴질랜드 7개월 살기 Day9

by 여행하는 과학쌤

뉴질랜드 집 구하기 절망 편을 쓰자마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거든. 뉴질랜드에서는 부동산 측이 시간을 정해 놓고, 여러 명의 세입 희망자를 한 번에 초대해서 집을 보여주는 게 일반적이야. 세입자도 집을 살펴보지만, 부동산 업자나 집주인도 세입 후보자들을 그룹 면접 하는 셈이지. 그러니까 정말로 취업 준비 하듯이 집을 구해야 해.


며칠 전에 처음으로 보러 갔던 집은 10명도 넘는 세입 희망자와 함께 방문했는데, 이곳저곳 부서진 흉흉한 분위기에 안 좋은 냄새가 찌들어 있더라고. 매물이 귀했기 때문에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했는데, 찌든 냄새 때문에 탈락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 이후엔 그 어떤 곳에서도 연락이 없다가 오늘 두 건의 연락을 받은 거야. 먼저 시티 중심에서 꽤 떨어져 있는 원룸형 레지던스에서 저녁 6시까지 오라는 연락이 왔어. 그런데 4시에 갑자기 시티의 아파트를 보러 오라는 다른 부동산의 전화를 받은 거야.


다급한 마음에 허둥대면서 버스 노선이랑 시간을 확인하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서 액정까지 박살 나고 말았어. 먹통이 된 휴대폰 때문에 연락처도, 지도도 안 보여서 그야말로 멘붕이었지. 옆에 있던 한국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파트에 찾아간 나는 여러가지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계약하고 싶다고 바로 지원서를 넣었어. 최소한 찌든내는 나지 않았고, 망설이다가 이 집마저 뺏길까봐 두려웠거든. 화장실 문이랑 옷장 문이 부서져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눈 감고 대충 살자 싶었어. 게다가 외곽에 위치한 레지던스로 가는 길이 퇴근하는 차들로 꽉 막혀 있길래, 시티 중심에 사는 게 좋겠다고 마음이 굳어졌어.


그래도 어쨌든 외곽의 레지던스도 한번 구경하러 가보기로 했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막상 레지던스에 도착하니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시설이 너무 좋은 거야. 그 레지던스를 보러 온 그룹도 10팀쯤 있었는데, 심지어 담당 에이전트가 나를 좋게 본 것 같았어. 영어를 잘한다고 뉴질랜드 시민이냐고 하더라고. 하하. 아침에 은행에 전화할 때만 해도 영어 소통이 하나도 안 됐는데. 부동산 관련 연락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집 구하기 분야 한정으로 영어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나 봐.


레지던스에서 순조로운 뷰잉이 끝나고 계약서 작성 직전 단계까지 갔는데, 뭐에 씌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망설이게 되었어. 시티의 아파트가 떠올랐던 것 같아. 레지던스가 시설은 좋았지만 세가 조금 더 비쌌고, 교통비도 더 들 테고 이동도 불편할 텐데 싶었어. 남편이랑 얘기 한 번 해보고 계약서를 쓰고 싶었는데, 오늘 하필, 정말로 하필, 휴대폰 액정이 박살 나버렸잖아. 시티로 돌아와서 휴대폰 문제도 처리하고 차분히 정리된 상태로 결정을 내리고 싶었어.


그래도 2시간 내로 마음의 결정을 내려서 레지던스에 다시 연락했는데, 그새 이미 계약이 됐다는 거야. 경쟁 팀이 많 걸 봤으면서 나는 왜 계약을 망설였던 걸까? 레지던스에 마음이 팔린 바람에 시티의 아파트도 계약이 무산되었어. 간신히 기회가 닿은 두 집을 다 놓친 거지. 집 구하기 희망 편에 거의 근접했기 때문에 엄청난 허탈함과 실망감, 우울감이 나를 덮쳤어.


속 곱씹고 후회하느라 잠 안 오고, 한없이 무기력한 거 있지? 시티의 부동산에서는 왜 하필 오늘 전화가 왔을까... 휴대폰만 안 떨어뜨렸어도... 중요한 순간에 왜 결단을 못 했을까... 밤새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어딘가 날 위한 방이 또 있겠거니 하고 마음을 다잡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 밤이야.


오늘의 Tip
뉴질랜드에서 집을 보러 가는 것을 viewing이라고 합니다. 부동산 중개인과 단 둘이 집을 보러 가는 우리나라와 달리, 부동산 중개인이 정한 시각에 그 집에 관심 있는 여러 명이 동시에 방문합니다. 집이 마음에 들면 지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여러 후보자들 중에 선택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viewing 시 부동산 중개인이나 집주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세입자로서 나의 장점과 의지를 어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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