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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거주자 그 사이 어딘가

뉴질랜드 7개월 살기 Day13

by 여행하는 과학쌤

살 집을 구하려고 2주 동안 끙끙 앓다가 더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어. 어디로든 떠나서 잠시라도 여행자의 마음으로 지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거든. 임시 숙소로 정한 캡슐형 호스텔이 답답해서 우울함을 심화시키는 것 같았고, 부동산에서 갑자기 연락이 올까 봐 멀리 떠나지 못하고 도심의 지박령이 되어 맴도는 것도 지쳐갔어. 귀한 기회로 멀리까지 와서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이 날 더 우울하게 만들었지.


어찌 되었든 뉴질랜드는 도시에서 조금만 나가도 천혜의 자연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 엄청난 장점이야. 이번 주말의 목적지는 와이헤케 섬. 오클랜드에서 페리를 타면 고작 45분 만에 색다른 풍경이 펼쳐져. 현지인들은 이 섬에서 결혼식을 열기도 한대. 그만큼 아름다운 섬이지. 작은 섬의 어디에서든 새파란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고, 초록색 일색의 들판에 펼쳐진 포도밭과 와이너리도 만날 수 있어.



와이헤케 여행을 검색해 보면 택시나 순환 버스를 타고 와이너리 몇 군데를 투어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았지만, 나는 3박을 하면서 여유를 즐기기로 했어. 한가한 여행자로서 남는 게 시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하루에 한 곳씩 천천히 걸어 다녔지. 섬이 크지 않아서 5km 남짓한 반경 내에서 웬만한 곳에 갈 수 있었으니 못 걸어 다닐 것도 없었어.


다행히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였어.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닷바람이 정확하게 균형을 잡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파란 하늘과 바다, 초록색 풀과 나무의 색감이 너무 선명해서 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쳐 버리기엔 아까운 길이 틀림 없었어. 오르락내리락 언덕길을 걷다 보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어. 몇 종류의 새가 있는 걸까 소리로 구분하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몇 시간씩 그림 속을 걸었어.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숙소로 돌아와서 창가에 몇 시간씩 앉아 있었어. 푸른 바다가 남색으로 짙어지다가 새까만 어둠으로 바뀌는 것, 파란 하늘이 노랗게, 붉게, 보랏빛으로, 그리고 새까맣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지겹지가 않았거든. 가로등도 드문 섬이라 더 짙은 어둠이 찾아오면, 집 앞에서 은하수도 보이고, 별똥별도 보였어.



이 한가함이 좋아서 여행을 할 때 한 곳에 오래 머무는 편이야. "유럽 4개국 10일 투어" 보다는 "소도시에서 10일 살기"를 더 좋아해. 그 10일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져서 이번에 "뉴질랜드 7개월 살기"를 결정한 거지. 하지만 지난 2주 동안 여행과 거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 나는 그냥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주거나 일자리에 대한 고민 없이 와이헤케 섬에서 3일 동안 여행자로 살자마자 숨통이 틔고 행복해졌거든.


물욕이 크게 없는 편이라 돈이 많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돈이 아주 아주 많아서 아무 고민 없이 여행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어. 여행자와 거주자, 그 사이 어딘가에서의 균형이 필요할 것 같아.



오늘의 Tip
와이헤케 섬으로 가는 페리는 교통카드를 이용해 쉽게 탈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여행자는 섬 내부에서 택시를 이용하세요. 정해진 와이너리 몇 군데만 방문하려는 여행자는 섬을 순환하는 Hop-on Hop-off 버스 티켓을 구입하면 좋습니다. 택시비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요 명소에서 여러번 내렸다 탈 수 있습니다. 섬 내부에는 일반 교통카드로 탈 수 있는 시내 버스도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여행자는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일반 시내 버스를 이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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