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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과학쌤 Dec 10. 2023

배보다 배꼽만 기억나는 여행

뉴질랜드 로드트립 - 밀포드 사운드

 가기 힘든 곳, 비싼 곳, 호불호가 갈리는 곳. 밀포드 사운드를 수식하는 말들이야. 밀포드 사운드가 뭐냐고? 사실 나도 잘 몰랐어. 유람선을 타는 유명한 관광지라고 이름만 많이 들어봤거든. 대충 찾아봤을 때 비싸고 가기 힘든 곳 같아서 뚜벅이 여행자 시절엔 과감하게 건너뛰었던 곳이야.


  밀포드 사운드에 가려면 퀸스타운에서 새벽에 출발해 밤에 돌아오는 투어 버스를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래. 퀸스타운에서 밀포드 사운드까지 왕복 여덟 시간이 걸려서 직접 운전하기 어렵거든. 하지만 종일 투어는 너무 비싸다는 게 흠이야. 그래서 우리는 밀포드 사운드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테아나우까지 가서 2박을 하기로 했어. 가깝다 해도 산길을 두 시간은 달려야 하기 때문에 텐트 대신 방에서 숙박하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지. 그리고 이 선택으로부터 파란만장한 하루의 서막이 열렸어.



  우리는 저렴한 캠핑장의 화장실 없는 80달러짜리 방을 선택했어. 맞아, 싼 게 비지떡. 이유 없이 비싼 건 있어도, 이유 없이 싼 건 없다잖아. 방도 방이지만 공용 주방과 공용 화장실이 심각하게 관리가 안 되어 있더라고. 여자 화장실은 달랑 두 칸만 열어 놓았는데 그나마 그 중 한 칸은 문이 안 잠겨서 이용할 수가 없었어. 캠핑장의 공용 화장실이 달랑 칸뿐이라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한 칸을 모든 숙박객이 이용하니 몹시 더러울 수밖에.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숙소. 파란만장한 일은 그다음 날 벌어졌어. 밀포드 사운드의 9시 유람선을 예약해 놓은 터라 5시 반부터 일어났어. 운전 시간이 두 시간, 주차장에서 선착장까지 걷는 시간이 30분으로 예상되어서, 6시에 출발하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지. 눈 뜨자마자 남편은 식빵을 구워 먹으러 공용 식당에 갔고, 나는 세수를 하러 공용 화장실로 향했어. 그런데 세수를 하고 돌아오니 방문이 잠겨있더라고. 그때까진 별생각 없이 공용 주방으로 가서 토스트를 먹고 있는 남편을 불렀어.

 " 잠갔어? 로션 바르게 열쇠 좀."

 "?????"


 문제의 이 숙소는 열쇠가 엄청나게 컸어. 방 번호가 써 있는 열쇠고리가 손바닥만 해서 챙겨 다니기 불편했던 거지. 그래서 화장실이나 주방에 잠깐 갈 때는 열쇠를 방에 둔 채 문을 잠그지 않고 다녔어. 밤에 잘 때만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잤는데, 아침에 문을 면서 잠금장치가 풀린 줄 알았거든. 그렇게 둘 다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방문이 잠겨버린 거야.


 우린 넋이 나갔어. 나는 잠옷 차림에 핸드폰도 없었고, 무엇보다 차키가 방 안에 있어서 어디도 갈 수 없었거든. 리셉션 건물은 잠겨 있고 전화도 받지 않았어. 리셉션 운영 시간 외에 긴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전화하라는 비상 연락처가 있었는데, 그 번호도 무응답이었어. 식빵 한 봉지와 폼클렌징 하나를 달랑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전화하는 것 말고는 할 수 는 게 없었지.


 '밤에 문을 잠그지 말걸. 열쇠를  챙길걸. 테아나우까지 오지 말걸. 이 숙소를 잡지 말걸. 그냥 텐트에서 잘걸.'

 온갖 ''이 머릿속을 떠다녔어. 오로지 밀포드 사운드에 가기 위해 이 숙소에 머문 건데 방문이 잠겨서 아무 데도 못 가는 상황에 놓이니 후회가 가득했지.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아침 7시가 넘어서야 누군가 전화를 받아서 비상키를 얻을 수 있었어.


 밀포드 사운드를 보긴 했냐구? 다행히 뉴질랜드 도로에 완벽히 적응한 남편이 구불구불한 산길을 무섭게 달린 덕분에 9시 유람선에 가까스로 탈 수 있었어. 하지만 그날의 파란만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테아나우에서 밀포드 사운드까지 110km 정도남아 있는 기름으로 충분히 다녀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굽이치는 산길이라 그런지 돌아오는 길에 반도 못 왔을 때 기름 경고등이 켜졌어. 지도를 찾아보니 테아나우가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그전까지 주유소가 단 한 개도 없었고, 그나마 밀포드 사운드에 주유소 표시가 있었어. 고민 끝에 차를 돌려 밀포드 사운드로 되돌아갔어. 가면서도 걱정이 한가득이었지. 가는 중 차가 멈추지는 않을지, 지도상의 주유소 표시가 자동차 휘발유 주유소가 맞는지 말이야. 다행히도 무사히 기름을 넣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멍해지더라고.



 그렇게 오고 가며 마음고생을 했으니 밀포드 사운드보다도 전후에 벌어진 일들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어 버렸어. 정작 밀포드 사운드에서는 남들이 좋다던 절경보다도 유람선 근처를 잠깐 스쳐간 펭귄 세 마리만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어. 유람선 투어가 끝난 후에는 왕복 세 시간의 짧은 트레킹도 했는데, '자갈과 나무로 뒤덮인 자연 그대로의 숲길이었다'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


 그래서 밀포드 사운드가 어떤 곳이냐구? 깊은 협곡 사이를 채운 바닷길을 달릴 수 있는 곳. 바다지만 절벽과 폭포로 둘러 쌓여 숲 속 같은 느낌을 주는 곳. 밀포드 트레킹 코스의 종착점이 있어서 트레킹 길도 살짝 맛볼 수 있는 곳. 자연경관, 특히 바다보다 숲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극호일 곳. 이미 뉴질랜드의 다양한 풍경을 충분히 즐겼고, 산이나 숲보다 탁 트인 바다를 좋아하는 나에겐 감흥이 크지 않았던 곳. 그래도 특별한 에피소드 덕분에 잊지 못할 곳.



오늘의 과학
 커다란 덩어리의 빙하가 산 위에서 바다를 향해 흐르면서 길고 깊게 파인 지형이 만들어집니다. 빙하가 녹은 후에 이 지형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좁고 긴 만이 생기는데, 이것을 피오르라고 합니다. 빙하가 흐른 길은 물이 흐른 길과 달리 U자 형태로 넓게 파여 있습니다. 이 U자곡의 한가운데에 떠 있다면, 양쪽으로 높은 절벽이 보이겠지요. 밀포드 사운드도 이렇게 만들어진 피오르 지형입니다. 과거 빙하가 지나갔던 길에 지금은 태즈먼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있지요. 내륙 쪽에서부터 태즈먼해까지 긴 만을 따라 유람선을 타고 왕복하면서 절벽과 폭포를 관람하는 것이 밀포드 사운드의 주된 관광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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