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와 프리맨틀, 서호주의 중심 도시에 있었던 것은 3주 간의 촬영 중 달랑 3일뿐이었어. 다른 곳에서는 촬영지들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숨쉴 틈 없이 이동해야 했는데, 도시에서는 촬영지가 모여 있으니 3일만으로도 충분했거든. 개인적으로 전체 일정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퍼스의 스카보로 비치야.
첫 번째 이유는 숙소. 그날은 란셀린 모래 언덕에서 샌드보드를 탄 후 퍼스의 해변을 촬영하는 일정이었어. 보드를 탈 줄은 모르지만 뭐든 일단 해보는 성격이라 무작정 들이댔어. 모래밭에서 넘어지고 구르는 것은 의외로 재밌기도 했는데, 온몸과 머리카락, 속옷까지 뒤덮은 모래가 문제였어. 그날은 심지어 생리 기간이었거든. 다음 촬영 전에 숙소에 들러 모래를 씻어내야 했는데, 하필 남자인 피디님, 감독님과 숙소를 같이 쓰는 날이었어. 내가 예민한 건 아닌지, 거금을 쓸 가치가 있는지, 수많은 내적 갈등 끝에 결국 개인적으로 호텔을 따로 잡았어. 모처럼 좋은 호텔에서 뽀송하게 씻고 나니까 세상이 눈부시게 밝아 보이더라고.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 퍼스의 사람들은 퇴근 후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야. 시내에서 20분 밖에 안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면 일하는 것도 덜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퍼스 해변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의적이었어. 호주에서 촬영하는 동안 한국을 좋아한다거나 유튜버냐며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촬영 카메라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거든. 불편한 분위기에 내내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오랜만에 사람들의 정을 맛보니 퍼스의 해변이 더 좋아져 버린 거야.
그리고 세 번째 이유. 스카보로 비치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이유는 일몰이야. 스카보로 해변에는 둥근 광장이 있고,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을 수 있는 계단식 객석이 마련되어 있어. 야시장의 푸드트럭이 하나둘 오픈 준비를 하는 동안,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이 객석을 메우더라고. 누군가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객석의 시민 중 아무나 무대로 내려가서 옆돌기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했어.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는 사람도 있었지. 그러다 바다 너머로 태양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사회자의 주도 하에 객석에 앉은 수십 명이 다 같이 박수를 치는 거야. 마치 공연장의 커튼콜처럼.
일출 명소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뜨는 해를 맞이한 적은 있어도 단체로 일몰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낸 것은 난생처음이었어. 그 순간이 이상하게 짜릿해서 스카보로 비치를 떠올리면 생생한 일몰 빛깔과 함께 공연장에 와있는 듯 전율이 일곤 해. 내 마음속에서는 세계 최강의 일몰 맛집이야.
출처 : EBS 세계테마기행 서호주편
지구의 자전과 일몰
땅이 넓은 호주에서는 바다를 향해 해가 지는 것만 보거나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만 봐야 해. 마음만 먹으면 동해에서 일출을 보고 그날 저녁 서해에서 일몰을 보는 것도 가능한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서호주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의 해돋이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아. 동호주의 바다까지 4000여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거든.
태양은 매일 예외 없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져.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하기 때문이지. 지구의 어느 한 점에 있는 사람이 동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태양은 그만큼 서쪽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일 거야. 지구가 하루 종일 동쪽으로 돌고 있기 때문에, 서쪽 바다로 태양이 넘어가는 저녁이 찾아오는 거지. 여기서의 동서는 지구를 2차원으로 펼쳐서 평면 지도를 만들었을 때의 방위 기준이야.
3차원의 지구본을 돌린다면 방향이 더 명확해져. 북극 하늘 위에서 지구본을 내려다보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그게 바로 지구의 자전이야. 그런데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지구본을 뒤집어서 남극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제는 지구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남반구에 살고 있는 호주 사람이 현대 과학 체계의 근간을 만들었다면, 과학책에는 지금과 달리 지구가 시계 방향으로 자전한다고 쓰여 있을 지도 몰라.
똑같은 태양이지만 어디에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관점이 제각각이야. 제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박수를 치는 거지. 누군가는 세계 최강으로 짜릿하게, 누군가는 하나의 천체로 덤덤하게. 이 우주에 태양은 하나지만, 일몰을 쫓을 때만은 매일 다른 마음이 들어. 그날 하루를 살아낸 나를 향해 커튼콜을 보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