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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10. 2021

임산부는 달리고 싶다

자주 누워야 하는 삶에 대하여

*

침대를 샀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겠다고 가구 없이 1년을 살았는데.

임신 4개월 차. 침대없이 자면 불편한 몸이 되었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매트리스에 누워,

나는 매일 달라진 몸에 대해 생각한다.

몸, 몸. 달라진 몸.

그 단어를 내 뱉을 때마다 몸통에 낯선 울림이 느껴진다.




*

아침 산책을 하다, 숨을 고르기 위해 공원 벤치에 앉았다.

조깅 하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임신이 미리 겪어보는 노화의 과정이란 생각을 했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안 따라준다는 말,

그래서 서럽다는 말은 임산부에게도 해당됐다.

달라진 몸에 저항하는 마음의 소리.


갑자기 룰루레몬 러닝팬츠를 입고 있는 힘껏 달리고 싶어졌다.


 

나는 '곱게 늙는다 '귀여운 할머니'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늙는 일을 흉칙하고 혐오스럽게 보는 시선보다는 낫겠지만

병들어 죽는 일을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는

두 가지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


노화와 노인에 대한 미화는, 몸이 버거워진 임산부에게

'고귀한 생명을 가진 몸'이라는 말로 위로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년의 지혜와 노인의 빈곤 문제가 별개의 일이듯

여성이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과

당사자의  육체적 이슈는 별개로 다뤄야 한다.



생명을 잉태한 '위대한 모성'이라는 이미지에 부풀려진 환상을 직시하고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실질적으로 들여다봐야,

국가가 그토록 골치 아파하는 저출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있는 힘껏 달려나가고 싶은 욕망과

자주 누워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 놓인 사람들은

비단 임산부들만이 아닐 것,



그나저나 침대 산 이야기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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