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료 Oct 11. 2021

희생과 포기라는 말 대신

임신은 내게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여행지로 떠나는 모험이었다.


*


두 달여간의 입덧 고행이 끝났다. 소주 세 병을 안주 없이 마신 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깨어난 기분도 거의 사라졌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주 천장을 바라봤다. 치료제 없는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외로움의 크기를 여전히 가늠할 수는 없었다. 어찌됐건 입덧의 고통은 끝이 있으니까. 이 고통에 끝이 없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주 생각해 보는 밤들이었다. 


일상에 감사하는 능력은 그 평범함을 잃어버렸다 되찾은 직후 최고로 발휘된다. 입덧이 사라지자 여느때처럼 산책을 하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다는 감격에 젖었다. 막달까지 입덧을 하는 사람도 있댔다. 그걸 떠올리며 감사 일기를 썼다. 


'입덧이 사라진 것에 감사합니다.' 

'비록 힘들었지만 아기가 건강한 것에 감사합니다'

'아무 사건 사고 없는 평범한 일상에 감사합니다' 


마지막 줄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둘째는 없다'



*



임신 전에도 나는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시도를 자주 했다. 하지만 그 감사의 마음은 100% 진심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두려웠다. 감사할 줄 모르면 누군가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려고, 감사하지 않을 일을 던져 줄 것만 같았다. 평범한 일상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저승의 심판처럼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다소 계산적인 생각이었지만 억지로라도 감사의 마음을 냈던 것이 임신 기간을 버티는 큰 원동력이 됐다. 감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스위치였다. 


나는 임신을 엄마로서 아기를 위해 오로지 감내해야 할 과정이라고 여기기보다, 한번도 가 보지 못한 여행지를 향한 모험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떠난 배낭 여행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힘든 일, 어려운 일에 맞닥뜨릴 때 그것을 '희생'이나 '포기'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임신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생겨서 내가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는 건 없었다. 임신이라는 여행을 선택한 건 온전히 나의 의지이자 선택이었으니까. 


내 안의 생명이 삶이라는 여정의 출발점에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새로운 여행의 시작선에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급속하게 사랑하게 된 뱃속의 작디 작은 존재를 이런 마음이 확실하게 지켜줄 것만 같았다. 100%의 진심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는 없었다. 그 감사의 마음 덕분에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니까. 



이전 04화 세상에서 가장 작고 어린 타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