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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10. 2021

세상에서 가장 작고 어린 타인

결국 아이도 낳고 보면 타인일 것이다.






*

임산부 커뮤니티에서 임신 호르몬에 관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수십 개의 댓글에 담긴 흥미로운 논쟁이 시선을 끌었다.


게시글을 올린 사람은 자신은 임신 호르몬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임신하고 오히려 극진한 대접을 받아서 심리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아슬아슬한 조언을 하기까지 했다. 임신 호르몬을 '핑계'로  감정을 마음대로 표출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얘기였다. 예상대로 글을 읽고 불쾌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임산부가 당신처럼 안정된 환경 속에 있는 건 아닌데, 자기만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어쩌면 그들은 지난밤, 남편에게 친정엄마에게 첫째에게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낸 사람일지 몰랐다. 몇 차례 자기 변호가 오고 갔지만 논쟁은 과열되지 않고 금방 끝났다. 다들 체력이 모자란 것이다.


30대 들어서 전에 없던 PMS를 겪으며 호르몬이 감정 기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주 생각해온 내겐 두 사람의 말이 다 일리가 있어 보였다. 호르몬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다스릴 필요도 있고, 주변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 게다가 '호르몬의 영향'이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영향을 받는 농도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게시글에는 분명히 경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안정된 심리를 가진 사람이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자기감정은 자기가 해결하세요' '징징대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냉정함 같은 것이 느껴졌달까. 나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비슷한 경솔함을 저질러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찔리기도 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작은 고통에도 민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시련도 의연히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있다.

후자의 유형이 전자의 유형보다 지혜로워서는 아니다.

홀로 지혜로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주변에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가 크다.

내면의 현명함과 의연함을 스스로 타고난 장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의 태도야말로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말하는 게

누군가에겐 불필요한 자랑이 되기도 한다.


남의 행복을 질투하는 속 좁은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섬세함을 연습하면 좋겠다.  


내 마음이 건강하다고 느껴질 때 자만하면서

 '당신도 건강을 좀 챙기세요'라고 말하기보다

옆에서 부축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연습이야말로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행복, 나의 심리적 안정, 우리 가족의 평화, 다 중요하지만,

결국 아이도 낳고 보면 타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작고 어린 타인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매일 울면서 고통이 무엇인지 학습하게 된다.

그 고통을 부모로서 완벽하게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옆에서 따듯한 눈빛과 사랑으로 지지하고 보살피는 것처럼


내 뱃속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면,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살 만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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