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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13. 2021

아들이든 딸이든

아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은 딸에게도 기대하지 말았으면



*


계절의 구분이 모호하고 사시사철 따듯한 호주지만, 절기마다 미묘하게 하늘의 질감과 색감이 미묘하게 다른 걸 느낀다. 이전 달보다 어쩐지 깊고 짙어진 하늘 아랠 걷다가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무심코 지나갈 때, 한 계절이 갔다는 헛헛함과 또 한 번의 계절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든다. 북반구든 남반구든, 3월은 부드러운 바람처럼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는 달. 뱃속 아기의 존재로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3월. 

거의 지나간 줄 알았던 입덧은 아직도 잔잔하게 남아있고 입맛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출렁거리는 배에서 막 내린 것 같은 상태로 하는 오후 산책. 공원 놀이터에는 아기들이 있고 아기들과 같이 노는 엄마들이 보인다.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던 풍경이었는데 이제는 책임감의 무게와 '일단 낳기만 하면 애는 알아서 큰다'는 말의 무책임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직 얼굴 모르는 생명의 20년이 내게 달려 있다니. 



*

임산부에게 좀 더 참신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비슷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게 조금은 지겹다. 


아이와 함께 할 기쁨과 환희, 부담과 책임, 의무와 계획 이런 거 말고 뭐가 있을까. 



 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모든 걸 받아들인 채로 있고 싶다.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도 없지만 힘든 걸 과장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걸 지금부터 연습하면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헬스장에 운동하러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째려보려다가 그만둔다. 각자 살아내야 할 몫이 다르므로. 그는 특유의 잔망스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울상인 나를 5초 만에 웃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게 얼마나 큰 정서적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

남편은 딸을 갖고 싶어 했다. 나도 내심 딸을 바랐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스스로가 달갑지는 않았다. 여자 아이가 가진 애교와 사랑스러움을 기대하는 거 같아서였다. 부모와 정서적 소통이 더 잘 되고, 결혼을 해서도 친정 사정을 살피고, 부모가 늙어도 살뜰히 돌보는 건 아들보다는 딸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남아선호 사상의 부작용처럼 느껴졌달까. 육아 관찰 프로그램에서 여자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할 때, 괜히 그 엄마들을 미워해 보기도 했다. 때에 따라, 아이가 어른을 위로하는 건 기특한 일이 아니라 버거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아들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은 딸에게도 기대하지 말았으면 했다. 자식에게 부모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달래야 할 부담을 지어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단련하고 싶다. 그 단련은 아이를 낳고 난 이후가 아니라 아이를 가진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일으킨다.

*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남편과 나는 여느 부모들처럼 성별에 상관없이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세상을 살기에는 아무래도 남자가 편한 것 같긴 하다며, 아이의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아들이어도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생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몸, 

무력함이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몸, 

아이를 갖지 않아도 되는 몸, 

폐경을 겪지 않아도 되는 몸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장단점이 있었다.




*


 임신하기 전 한참 달리기를 할 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뛰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숨을 헉헉 거리며 뛰고 있다. 반 바퀴도 달리지 못했던 그는 이제 쉬지 않는다.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더 늦춘다. 



나를 만족시켜줄 무언가를 찾는 대신 불만족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달, 

전에 없던 3월이 무심하게, 그러나 온화하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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