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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11. 2021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

배제와 소외, 격리가 없는 삶을 꿈꾸며 

*

오늘로 임신 8주차가 되었다. 다른 몸이 되고부터 내가 살아갈 세상이 아닌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자주 상상하게 된다. 내가 지나온 어린 시절보다 순수하면서도 성숙한 시간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자라야 할 것 같다. 



*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반 배정을 받던 날을 기억한다. 얼굴이 희고 키가 큰 남학생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왠지 그 애는 공부도 운동도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발달 장애인이었고 간질을 앓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업 시간에 자주 쓰러졌다. 열네 살의 우리는 그의 미숙함을 조롱했고,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모습에는 충격을 받았다. 그와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애가 저 정도면 특수 학교에 보내야지, 정말 엄마 고집도...' 


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잇다. 여섯 살 정도의 지적 수준이었던 그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하는 말을 다 이해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에겐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악세사리에 망사 스타킹을 즐겨 신던 중년의 국어 선생님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 선생님 앞에서는 그 친구는 얌전했고 잘 웃었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그를 사랑으로 칭찬했고 사랑으로 꾸중했다. 귀찮아 하거나 성가셔 하지 않았다. 그가 엉뚱한 소리를 할 때마다 비웃고 놀리는 다른 남학생들의 태도를 따끔하게 지적했다. 


멋쟁이 국어 선생님은 한 학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전근을 갔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 애도 결국 특수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결정이 그 애에게 잘 된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채로 2학년이 되었다. 그즈음 수학과 영어 과목의 우수반과 노력반이 생겼고, 우리는 일주일의 몇 시간을 좋아하는 학급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이 하나 둘, 학교 밖으로 내쳐졌다. 우리는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배제'와 '격리'와 '소외'를 배웠다. 


 나는 '함께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이제야 외국어를 배우는 심정으로 조금씩 배워가고 있지만, 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아이를 아직 낳고 길러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도 비장애인 아이를 낳으면 장애인 아이와 어울리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될까. 그런데 만일 내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면,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게 된다면 어떨까. 임신을 한 상태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일까. 하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좋다는 것'만 보여주려고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배제하고 격리하는 태도와 무엇이 다르지. 

*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이야기였고 몇 년전까지만 해도 성범죄는 범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100년 전 사람들에게 21세기의 전자제품은 유니콘이나 해태 같은 상상 속의 존재다. 


우리에게 더 나은 현실을 꿈꾸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이상'을 운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귀찮고 피곤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그게 만약 나의 일이라면, 내 아이의 일이라면, 그래도 더 나은 현실이 아닌 지금의 답답한 현실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

성인이 되고부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입덧을 경험하면서 몸의 고통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만일 입덧이 평생 안고 가야 할 불치병이라면 나는 어디서 희망을 찾으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어떤 희망도 없을 것 같다. 


너는 입덧은 하지만 걷고 뛸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한 줄 알으라고 누가 말한다면 화가 날 것이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입덧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설에 갇혀 살아야 한다면 절망할 것이다. 입덧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 정책에 수많은 대중들이 반대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인간이 아니라 '입덧인'이라고 부르며 전염이라도 될까봐 슬금슬금 피한다면, 삶을 포기하고 싶어질 것 같다.

장혜영 국회의원의 말대로 세상에 연약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굳이 임신이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면 홀로 늙고 병 든다. 비장애인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자립'이 가능하다. 그리고 '함께' 라는 말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필요한 단어다. '함께' 라는 느낌이 주는 편안함, 안정감을 여태껏 살면서 제대로 느껴본 적이 있었는지. 


내 아이는 나보다 그 말의 의미를 더 잘 알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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