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그저 태어났으니까 살고, 병들고 늙으면 죽는 거란다
안녕.
나는 여전히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자주 잊어. 너는 나름대로 존재감을 알리고 싶어서 꿈틀거리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쪽에선 아직 하나도 느낄 수가 없단다. 사람이 사람을 품는다는 걸 아직도 믿을 수가 없네. 나도 한때는 누군가의 뱃속에 있었는데 말이야.
요즘 거의 누워서 지내고 있어. 지금 이 편지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소파에 누워 쓰고 있고. 마치 몸이 내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나는 누워서 티비를 보다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 유튜브 영상을 틀어두기도 해. 가끔 혼자 아이스크림을 사서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지겨워지면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감정 기복은 별로 없단다. 불편함이 날 우울하게 만든 적은 없거든. 나는 바꿀 수 없는 현실과 잘 싸우려 들지 않는 쪽이야. 승산 없는 싸움은 개입하지 않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거든. 잘 들어, 이건 우리집 가훈이기도 해.
먼훗날 사춘기가 와서 네가 내게 왜 나를 낳았냐고 따지게 될 지도 모르고, 좀 더 똑똑하게 예쁘고 잘생기게 낳을 수 없었냐고 항의할 걸 대비해 가훈을 미리 알려주는 거야.
사람은 그저 태어났으니까 살고, 병들고 늙으면 죽는 거란다. 이 사실과 싸우면서 의미를 찾으려는 순간부터 삶이 굉장히 고달파져. 구할 수 없는 걸 구하려다 보면 불행해지지. 너나 우리나 굉장한 확률로 각자 세상에 태어나 서로를 만나는 거야. 그것보다 더 큰 의미란 없단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린 이미 인생에서 달성해야 할 과업의 반 이상을 성취한 거야. 똑똑하다거나 예쁘다거나 착하다거나 하는 나머지 삶의 조건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야. 뭐....있으면 편리하겠지. 없다면 불편하겠지만 우울하지는 않아. 알겠지? 없다는 생각이 우울하게 하는 거란다. 태어나지도 않은 너에게 너무 깊은 이야기를 했나. 인생 별 거 없다고 벌써부터 시시해하는 건 아니지? 사실 웃기고 재밌는 것 투성이란다. 기대해도 좋아.
하루에 한 번 소리내서 웃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괜찮은 인생인 것 같아. 참고로 너의 부친은 나를 10년째 웃게 하고 있어. 네가 언제 내 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 왠지 나는 웃고 있었을 거 같아. 너의 부친은 언제 어디에서나 유머를 발휘하고 웃음도 많거든.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웃는 사람이란다) 그것은 내가 아이를 가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였어. 지난 10년 동안 그가 짜증을 내거나 얼굴 찌푸린 걸 본 적이 없거든. 아이를 키울 때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 10년 동안 내 옆에서 나를 무한히 사랑해 준 어떤 사람에게 무엇보다 귀한 선물을 안겨 주고 싶기도 했고.
너는 우리 중 누구를 닮았을까. 성격이나 기질은 알 수 없지만 왠지 외모만큼은 부친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않을까 한다. 나중에 너도 알 거야. 유전자의 농도라는 것을......
하지만 그럴때마다 가훈을 꼭 명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