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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22. 2021

내가 나인 줄 모르던 순간들



1

해오가 우리에게 온 지 오늘로 18일 차. 신생아 시절은 정말 금방 지나간다는 사실에 힘내서 육아 중이다. 해오와 내가 이렇게 서로 꼭 붙어있을 날이 매일 하루씩 줄어든다는 생각을 하면, 아쉬움을 넘어서 약간 슬프기도 하다. 분명 내 뱃속에 있었는데 언제 나왔지, 신기하기도 하고. 해오가 태어나자마 내 배 위에 얹힐 때의 촉감과 온기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와이와 그 순간을 회상할 때면 웃음이 난다. 정신없이 울 줄 알았는데, 그때 해오의 표정은 마치 '저... 이제 뭘 하면 되죠?' 였으니까. 

해가 질 무렵에는 난생 겪어보는 종류의 평화로움 속에서 잔잔한 상실감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만삭 시절의 버거움을 떠올리면 이내 잊히고 만다. 그리움이란 사실보다 허구가 더 많이 섞인 감정이라고 믿는다. 



2

2-3주 차에 원더 윅스가 온다고 해서 내심 긴장했는데, 해오는 조용히 넘어갔다. 낮에 깨어있는 시간이 조금 늘기는 했지만, 배고프지 않은 이상은 울지 않는다. 모빌이나 장난 감 없이도 우리와 잘 놀아준다. 배고플 때 해오가 보내는 신호가 있는데 - 맹구 같은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면서 헥헥 댄다 - 그걸 볼 때마다 반가워 죽겠다. 해오는 내가 본 어떤 인간보다 눈을 부드럽게 깜빡이고, 입을 가볍게 다물고 있다. (오직 먹을 때만 맹렬하다)  꼭, 인생을 한번 살아봤던 사람처럼, 아기로 사는 일을 익숙해하는 거 같을 때도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오에게 '오늘도 기쁘게 살아보자' 하고 말한다. 

눈을 감기 전에는 '오늘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사줘서 고마워' 하고 마무리한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3

와이는 (예상보다 더) 해오와 사랑에 빠졌다. 양가 부모님도 해오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는 낙으로 산다고 했다. 아기는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눈동자를 굴리고, 다리를 버둥거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포동포동 살이 오르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받는다. 해오를 보면서 나는 기억나지 않는, 절대로 기억할 수 없는 나의 갓난아기 시절을 떠올리려 애써 본다.  내가 마주친 무수한 타인의 신생아 시절도 상상해 본다. 

어른들은 왜, 아기처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없는 걸까

4

하루에 한 번은 무리가지 않는 선에 가볍게 산책을 한다.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햇볕도 쬐고, 산들바람도 느끼고. 동네 산책하는 거 만으로도 리프레쉬가 된다. 매일 걷는 길인데도, 매일 다른 풍경들. 매일의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5

평생 아기 없이 살 거라고 습관처럼 우격 다짐을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기를 낳았다. 

오랫동안 와이가 원했지만, 선택은 100%  나의 몫이었다.

은근히 세뇌를 당한 걸 수도 있다. 아무튼, 대단한 남자... 

막상 낳고 키워보니 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그저 내 살과 뼈를 깎아먹으며 희생만 죽도록 해야 하는 무언가로 치부했던 것 같기도. 과연, 내가 아기를 낳아 기를 깜냥이 될까, 하는 생각도 사실은 무용했다는 거 알겠다. 아기가 어느 정도 부족한 부모의 그릇을 채워주고, 키워주기 때문에. 






6

아기가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달라진 실내공기. 

해오는 고요하다. 

해오를 보고 있으면 

천천히 흐르는 강을,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무릎 위에 웅크리고 앉은 고양이를,

한여름 밤의 별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해오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깊은 선정에 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살면서 누군가의 눈을 이토록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까만 동공 위에 해오를 바라보는 내가 선명하게 보인다. 

까닭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아직 자기가 해오인 줄 모르는 해오는,  

세상 어떤 것에도 이름 붙일 줄 모르는 해오는, 

정말로 아름답다.  

세상 아기들은 다 아름답다. 

해오가 해오인 줄을 알게 되는 시기가 올 때,  

다가올 미래에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지는 순간이 왔을 때, 

이 일기를 보여주고 싶다.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 찬 네 마음의 본모습은 이러했다고,

알려줘야지. 


어제 해오는 창 밖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때 해오의 눈에 저녁 하늘이 있었다.

혹시 너 저기서 왔어? 하고 물었다. 

아기를 키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오글거리는 멘트를 많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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