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가을.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바꿔 쓰고 나니, 다시 맞이한 런던의 가을이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도수가 맞는 안경을 처음 썼을 때처럼, 계절이 또렷하게 보였다. 런던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을의 색, 사각거리는 공기의 질감, 미묘하게 은은해진 햇빛, 그리고 '달리아'와 같은 가을꽃.
확실히 초가을은 한 입 베어 물면 '아삭' 소리가 날 것처럼 사각거렸다. 나는 그 기분 좋은 감촉을 배터시 파크에서 느꼈다. 특히 토요일 아침,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 시간의 가을. 오전 아홉 시 즘 파크에 가면, 사람들은 부지런히 주말과 계절을 누리고 있었다.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며. 나도 덩달아 주말의 시작을 앞당겨 러닝화를 신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걸 진짜 싫어했는데. 30분 정도 걷고 달리기를 반복해 도착한 곳엔, 파란 하늘과 템즈강이 거짓말처럼 펼쳐져 있었다. 파크 양 옆에 있는 알버트 브릿지와 첼시 브릿지를 바라보며 숨을 골랐고.
'다리를 건너면 어느 동네였더라. 자전거 타고 한번 건너가 볼까.'
달리기를 마치고 나면 상쾌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폐를 지나,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씻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파크를 나와 바로 근처 단골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보통 이런 시간을 보냈다.
주문한 커피를 받고 한쪽 자리에 앉는다. 나처럼 운동을 끝내고 커피 한 잔 하는 런더너들로 가득 찬 공간. 이제 겨우 오전 10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후후 불어 홀짝이며 그들을 관찰. 내 앞에 보이는 것들을 음미한다. 바나나브레드와 커피를 마시며 이번 주가 얼마나 정신없었고 드디어 찾아온 주말이 얼마나 좋은지를 나누는 무리들. 마침내 긴 달리기를 끝내고 함께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는 러닝 크루. 창가에서 책 읽으며 가을 햇살을 누리는 예쁜 영국 여자.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오전 11시.
날 찌르던 날카롭던 바늘을 바로 잡는 일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바로 아는 일. 그렇게 다시 알게 된 나를 귀중히 대하는 일. 바늘은 펜이 되었고, 나는 그 펜으로 지금, 이곳 (2022년 가을, 런던)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았다.
- 차도를 달려야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공용자전거 타기
- 파머스 마켓 (Farmers' Market) 가기
- 그곳에서 장보기
마침 집 근처엔 공용자전거 거치대가 여러 군데 있었고, 나는 용기를 내어 자전거에 올라탔다. 먼저 차가 안 다니는 공원에서 충분히 연습한 후, 처음으로 알버트 브릿지를 건넜던 날. 다리를 건너 마켓에 도착해 색이 고운 가지와 가을꽃 한 다발을 샀던 그날. 행복했다. 그리고 분명히 느꼈다.
어떤 올무에서 벗어난 듯한 선명한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