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소중하고 반짝이는 기억들.
1.
"윔블던 산다고 했지? 그 옆동네 매장에서 일하게 될거야. 거기 매니저랑 나랑 친한데 그 매니저가 휴가 중이어서 내가 대신 너를 인터뷰하는 거고. 아 그 사람이 한국인이랑 일하는 걸 좋아해. 그래서 네가 거기서 일하게 된거야."
인터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이력서를 냈던 곳은 스타벅스처럼 런던 여러곳에 체인점이 있는 큰 카페였다. 웹사이트를 통해 이력서를 냈더니 본사 career팀에서 연락이 왔고, 그는 어디어디 지점으로 인터뷰를 보러 가라고 했다. 그 어디어디 지점은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매장이었다. 그곳 매니저와 한번 더 인터뷰를 하고 트라이얼을 한 다음, 나는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리집과 가까운 다른 매장에서 일을 하기로 되었고. 역시 카페여도 규모가 큰 회사는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던 건 본사교육에서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런던이었다.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와서 공부를 하고 일을 하는 대도시 중의 대도시. 교육날에도 나를 포함해서 스페인, 헝가리, 이탈리아 등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나마 조금 다행이었던 건 영어실력이 비등비등했다는거. 여하튼 모든 것이 서툰 우리들은 에스프레소 적정 추출 시간은 몇 초이고, 카푸치노는 거품이 몇 센치이고 등등의 이 카페만의 매뉴얼을 배우고 연습했다. 본사교육이 끝난 후엔 각자 지정받은 매장으로 가서 10시간 정도 커피를 만드는 연습, 손님을 받아보는 연습을 했는데 그 연습시간까지 다 끝나야 본격적으로 계약서를 쓰고 일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실전에서 연습해보는 건 생각보다 낯설고 어려웠다. 아 벨벳 텍스쳐의 플랫화이트를 만드는 게 어찌나 어렵던지. 그리고 메뉴의 가짓수는 왜그리 또 많은지. 다 외우고 익혀야 하는 것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손님. 영어로 외국인인 손님의 주문을 받는 건 늘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기간동안 즐겁게 배우고 연습했다. 드디어 이곳에서 일을 한다는 생각에, 돈을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 하나 이룬 것 같아서.
2.
모든 게 다 배움이고 도전이어서 어려웠지만 신기한 점들도 많았다. 내가 배웠던 매장은 로펌 회사가 모여있는 동네에 위치했는데 오전시간이나 점심시간 즘이면 회사원들이 줄을 길게 서있곤 했다. 그 줄이 신기했다기보다 그들이 주문하는 말들이,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하는 한국말이 아니어서, 그들의 표준적인 영국발음들이 내 귀를 왔다 갔다 해서. 그래서 신기했다.
런던에 처음 와서 카페에 갔을 때가 불현듯 생각났다. One Americano please라고 말하기 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문장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왠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안왔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가 영어로 뭐지?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나름 오래전부터 영어공부를 해왔는데, 나름 회화학원도 다녔는데, 이 문장 하나가 영어로 생각이 안나다니.
나는 그때 그 매장에서, 바리스타 유니폼을 입은 후에야 내 머리로는 도무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바로 그 문장이 내 귓 속으로 쏙 들어오는 걸 느꼈다.
"Can I get a black americano, please?"
이 문장에서 더 흥미로웠던 것은 캔 아이 갯어 ~ 가 아니라, 캔 아이 겟 , 에이 - 하고 a를 에이- 라고 발음하면서 조금 쉼표를 준다는 것. 그 문장과 억양과 발음을 기억해두고 그후에 카페에 갈 때마다 그 문장을 꺼내어 썼다.
3.
교육이 끝난 후는 점심이 지난 오후였다. 집에 곧장 들어가기엔 너무 아까워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곤 했는데 그 시간도 신기했다. 오늘도 큰 실수 없었다, 하며 한숨 돌리고 걸어다녔던 거리가 런던의 중심지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빅벤이 보였고, 저 멀리엔 런던아이가 보여서. 내 주변엔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구경하기 바쁜 관광객들이 즐비했다. 이제 이곳을 여행하는 게 아니라 산다고 생각하니, 짜릿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그때 나는 아마도 어쩌면 내 20대 중에 지금이 가장 반짝일 지도 모르겠다고 직감했다. 지나고나니 정말이었다.
마지막 교육을 끝낸 날에도 어김없이 놀다가 들어가자 싶어 하염없이 런던 속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세인트 폴 대성당 근처에 닿았는데 마침 정각이라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한참을 그 맑은 소리에 생각을 비우다가 또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계획이라곤 전혀 없는 여유로운 발걸음이었을거다. 아마 내가 여행자였다면 빠르고 정신없는 걸음이었겠지 하며. 그렇게 가다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모여 걷길래 저기는 뭐지 싶어 따라 걸어갔더니 그곳은 밀레니엄 브릿지라는 다리였다. (그곳이 밀레니엄 브릿지라는 것도 잘 몰랐다.) 다리 중간 즘엔 어떤 분이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고. 영롱한 하프 소리 덕분인지 꼭 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다리 건너 보이는 건물이 왠지 익숙했다. 저기 뭔데 익숙하지? 건너가서 보니, 바로 테이트 모던이었다. 내적흥분을 가라앉히며 나는 잠시 그곳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밀레니엄 브릿지를 건너 테이트 모던으로 가는 길. 일 끝나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갔던 곳이 그 길이라니. 내겐 그것만으로도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1. 세인트 폴 대성당이 보이는 길 / 2. 밀레니엄 브릿지 위에서 / 3,4. 테이트 모던)
"저기 혹시...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테이트모던 건물에서 보이는 바깥풍경을 구경하고 있는 찰나, 어떤 한국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흔쾌히 사진을 찍어드리고 동시에 내 사진도 부탁했다. 그녀가 가고 사진첩에 남겨진 내 모습을 바라보니 사진 속 내 모습은, 한껏 꾸민 그녀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정말 일을 마치고 나온 어느 사람같이 조금 초췌했다. 맞아 나는 여행 중이 아니지. 일을 하고 있지. 이상하게 묘한 기분이 내 곁을 맴맴 돌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인 걸 너무나 알아서. 노동자의 모습으로 테이트모던을 방문할 일은 20대엔 더는 없을 걸 알아서.
그때가 여름 끝자락이었다. 가을이 찾아오며 나도 얇은 여행자의 옷을 벗고, 조금은 두툼한 생활자의 옷을 입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불 삶의 바람으로부터 나를 지켜내고 살아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