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는 작업을 할 때마다 새로운 텍스트를 받아 든다. 텍스트의 원저자는 물론 주제나 장르, 문체 스타일, 독자까지 바뀌므로 매번 리셋하고 다시 출발한다. 그러다 보니 언제 어디에서 어떤 어휘가 튀어나올지 미리 가늠되지 않는다. 낯선 미지의 어휘가 섞여 있을 수도 있고, 익숙한 어휘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조되어 있을 수도 있어서 늘 촉수를 예민하게 세워야 한다.
아무리 경력이 쌓였어도 번역을 하다 보면 누구나 ‘어휘력’의 한계로 머리를 쥐어짜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번역가는 원문의 속뜻을 포착한 후 새롭게 재표현해야 하는 중재자다. 즉, 이해한 의미의 표상을 맞춤한 언어로 꺼내어 놓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머리 속에 부유하는 이미지를 적확한 단어로 끌어내지 못해 머뭇거리고, 한없이 늘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러한 버퍼링 구간을 단축하려면 어휘 자산을 꾸준히 늘려두는 것이 상책이다. 어휘력이 풍부하면 한결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고, 글맛을 더욱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을 번역한 결과물들이더라도 어휘의 활용도와 결집도에 따라 텍스트의 결은 제각각 일 수밖에 없다. 결국 어휘력은 번역의 최종 완성도를 결정하는 기본 요소다. 번역가의 어휘가 빈약하면 번역문도 단조롭고 초라해진다. 그러니 번역가에게 어휘는 늘 갈구의 대상이다. 어휘 하나에 일희일비하거나 예민해지기도 한다.
한번은 통번역대학원 번역 수업에서 기업 마케팅 사례에 관한 중국어 텍스트를 과제로 내준 적이 있었다. 일부 브랜드들이 유기동물 지원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중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했다.
예) 品牌会通过打造①宠物流浪屋、发起‘领养代替购买’的活动来为这些②毛孩子提供温暖的庇护所。
(브랜드들이 유기 반려동물 보호소를 마련하고 입양 홍보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동물들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후원하고 있다.)
수업 준비를 하며 나의 뇌를 풀가동시켰던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毛孩子’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반려동물’은 ‘宠物’(①)라고 부른다. ‘毛孩子’(②)는 ‘털’이라는 뜻의 ‘毛’와 ‘아이’라는 의미의 ‘孩子’가 합쳐진 단어로 원래는 ‘애송이’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요즘에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일컫는 애칭으로도 쓰인다. 문제는 한 문장 안에 일반적인 지칭어인 ‘宠物’와 친근하고 다정한 어감의 애칭인 ‘毛孩子’가 모두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맞춤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으면 번역가는 단어 구분 없이 ‘반려동물’로 일괄 번역하거나 ‘동물’이라고 단순화하거나 ‘털이 난 아이’라고 직역하거나 아예 생략하는 등의 차선책을 두고 고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어감이 다른 두 단어를 차별화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표현하거나 슬그머니 생략하면 원문의 취지를 그대로 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번역문 자체도 밍숭밍숭하니 어딘지 허전해진다. 단어 하나에 뭐 그리 집착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글을 옮기는 일을 하려면 사전으로 해결되지 않은 단어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대응어를 발견해내는 경험이 쌓여야 한다. 번역가의 어휘력 부족으로 어휘의 존재감을 덮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나는 ‘귀여운 어감의 반려동물 지칭어 찾기’ 미션에 돌입했다. 헤맨 끝에 마침내 고른 단어는 “댕냥이”. 모 한국 기업의 유기동물 캠페인 홍보 문구에 등장한 단어에 착안했다. 자칫 번역문에서 사라질 뻔한 단어가 맞춤 옷을 입은 것 마냥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어휘력이 탄탄하고 풍부하면 번역가 입장에서 표현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몇 년 전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평창의 어느 산촌에 사는 어느 부부가 ‘닭반대기’라는 요리를 하는 모습이 나왔다. ‘반대기’라는 생소한 단어에 궁금증이 발동해 바로 사전을 뒤졌다. 처음에는 사투리인가 했는데 ‘반죽을 평평하고 둥글넓적하게 만든 조각’을 지칭하는 순우리말 명사란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노트 한 켠에 용례와 함께 메모해두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 뒤로 음식 관련 텍스트를 의뢰 받아 번역하는데 조리 과정 중에 ‘捏成片’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뭉친 고기소나 밀가루 반죽류를 누르면서 둥글고 납작한 모양을 만든다’는 의미다. 그 순간 영상에서 봤던 이미지와 함께 ‘반대기’라는 어휘가 기억 속에서 솟구쳤다. 덕분에 ‘둥글납작하게 빚는다’라고 옮길까, ‘반대기를 짓다’라는 표현을 써볼까 저울질하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이처럼 번역가는 어휘를 뭉뚱그리지 않고 선명하게 출력하는 재생력과 다양한 선택지를 준비해 상황에 따라 능숙하게 퍼즐을 맞추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따라서 언제든 맞춤한 어휘를 꺼내 쓸 수 있도록 나만의 ‘어휘 곳간’을 든든히 채워 두어야 한다. 이 순간 내 ‘어휘 곳간’이 휑하지 않게 짬짬이 새로운 어휘를 캐거나 주워 나르며 쟁이고 또 쟁여야 한다. 물론 채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자꾸 들여다보며 손쉽게 찾을 수 있게 정리해야 한다.
경험상 어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표현을 늘리는 데는 ‘독서’와 ‘기록’만 한 것이 없다. 다양한 자료들을 읽으며 새로운 어휘들을 계속 경험하고 흡수해야 한다. 그래서 난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들추고, 온갖 매체 공간을 유영하고, 주변의 사물들을 주시한다. 활자가 펼쳐진 곳이라면 기꺼이 여기저기 활보하고 배회할 의향이 있다. 주옥 같은 어휘들을 발견하고 적립하는 소소한 기쁨을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