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방송인 유재석은 유고스타, 유산슬, 유르페우스, 유두래곤, 지미유 등 다양한 부캐로 변신했다. 메인 MC라는 본래 캐릭터를 내려놓고 매번 새로운 부가 캐릭터로 주어진 상황 속에 천연스럽게 스며드는 모습이 신선했다. 이처럼 본캐와 부캐를 넘나들며 상황마다 다른 정체성을 표출하는 ‘멀티페르소나’ 현상은 어휘에도 적용된다.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흐름 속에서 어휘도 서서히 변주되며 부캐가 하나 둘 더해진다. 하나의 의미로 단출하게 시작했어도 쓰임이 거듭되고 확장되면서 파생적 의미들이 켜켜이 포개지며 입체화되기도 한다.
먹거리를 지칭하는 용어들의 외연 확장이 대표적 사례다. ‘고구마’, ‘사이다’가 사람이나 상황이 ‘답답함’과 ‘통쾌함’을 형용하는 비유어로 이미 널리 쓰이고 있고, ‘단호박’은 성격이나 언행이 ‘단호한 사람이나 태도’를 일컫는다. 단순 먹거리 지칭 명사에 불과했지만 그 속성과 발음의 유사성에 착안한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지면서 활용범위가 넓어진 경우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 성분이 응축된 다의어들은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번역할 때도 원문에서 의도한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전 1열에 제시된 명제적 의미만을 고려해 무심하게 툭툭 옮길 것이 아니라 본캐와 부캐 사이 어디쯤 서있는지 저울질하며 신중하게 옮겨야 한다. 중심 의미로 쓰였는지, 파생 의미로 쓰였는지, 그도 아니면 저자가 새롭게 부여한 별도의 의미가 있는지 가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래 제시된 예시들에는 '점성, 접착성, 찰기' 등의 의미를 지닌 중국어 어휘 ‘粘性(niánxìng)’이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각 문장에 해당하는 한국어 번역본을 살펴보면 '粘性’이 획일적으로 대응되지 않고 맥락에 적절하거나 익숙한 어휘로 재표현했다.
1) 这个双面胶带具有良好的粘性。
(이 양면테이프는 접착력이 좋다.)
2) 杂粮做出来的饭不会像糯米那样有粘性。
(잡곡으로 만든 밥은 찹쌀밥보다 찰기가 떨어진다.)
3) 用户体验是提高平台用户粘性的决定因素。
(사용자 경험은 플랫폼의 사용자 고착도를 높이는 결정적 요소다.)
4) 价格粘性较强,一旦上涨就很难回落。
(가격 경직성이 높은 편이라[=가격 변동이 심하지 않아서] 한번 오르면 쉽게 떨어지기 않는다.)
5) 因为每集之间的情节缺少粘性,很难让观众产生去追剧的欲望。
(에피소드 간 스토리 연계성이 부족해 시청자들의 정주행 의지가 꺾인다.)
예문 1)과 2)에서는 단어의 원의미를 채택하되 사물 대상에 따라 테이프에는 ‘접착력’이라는 대응어를, 곡식에는 ‘찰기’ 대응어를 활용했다.
3), 4), 5)의 경우는 ‘끈적끈적함, 끈끈함’이라는 1차적 의미가 확장되어 활용된 사례다. 가령 ‘사용자, 유저(用户)’라는 단어와 결합된 ‘粘性’은 풀이하자면 ‘특정 브랜드에 대한 사용자들의 애착이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것을 ‘사용자 접착도’, ‘사용자 찰기’와 같이 즉물적으로 번역해서는 안 될 일이다. 도착어 현장의 유사한 상황에서 실제 사용되는 적절한 표현을 찾아 적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사용자 고착도’나 ‘사용자 충성도’ 등의 표현이 어울린다.
4)의 ‘价格粘性’은 ‘가격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정도’라고 1차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만큼 외부 변수에 심하게 휘둘리지 않는 특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격 경직성’이나 ‘가격 변동성’ 등 발화 맥락에 적합한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문 5)에서 드라마 매회 차 에피소드 간에 ‘粘性’이 부족하다는 것은 스토리가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귀결되므로 ‘스토리 연계성이 부족하다’고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휘에 잠재된 다양한 캐릭터성을 파악하고 글로 오롯이 재생시킬 수 있느냐는 결국 번역가의 어휘력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어휘의 이미지 변신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상황과 역할에 맞는 ‘스타일링’을 하기 위해 번역가의 어휘 공부는 늘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