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동영상을 한참 들여다보던 딸아이가 영상 속 엄마의 들뜬 목소리가 낯설단다. 대화상대가 아장아장 걸어다니기 시작한 아기였으니 최대한 간결한 어휘를 사용하면서도 아주 또박또박, 과장되게 때로는 호들갑스럽게 표현했을 것이다. 아마 내 인생에서 최고 높은 톤의 목소리를 장착했던 시절이 아니였을까 싶다. 이제 훌쩍 성장한 딸과는 어른과 대화하듯이 편안한 톤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딸과의 대화 뿐만 아니라 듣는 상대에 따라, 주변 상황에 따라 내 말투나 어휘 선택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친정부모님과는 정겨운 ‘고향 사투리’ 모드로, 일과 관련된 관계자에게는 최대한 격식을 갖춘 ‘생계형 말투’ 모드로, 오랜 친구들에게는 가볍고 편하게 풀어놓는 ‘수다체’ 모드로 그때그때 언어 주파수를 맞춘다.
이처럼 어투나 어휘도 TPO(Time, Place, Occation)를 고려한 적절한 ‘코디네이션’이 필요하다. 대화 당사자가 위치한 시간, 공간, 상황에 따라, 마주한 대상에 따라 어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언어변이 현상을 흔히 ‘사용역(레지스터, Register)’이라고 부른다.
음식 레시피를 소재로 소통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같은 주제로 대화하더라도 입말로 하는지, 글말로 하는지, 온라인 채팅창으로 하는지 그 전달 방식이나 매체에 따라, 또는 상대가 친밀한 상대인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어려운 상대인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상대인지, 어린 아이인지, 나이든 어르신인지, 또래인지 등 수신자와의 친밀도나 관계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 형식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행사나 회의에서 발언하는 상황인지, 방송매체를 통해 송출되는 상황인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황인지, 실습 강의에서 시연하는 상황인지 등 발화자가 처한 환경적 맥락과 변수들도 언어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밥’이라는 뜻의 중국어 ‘飯’은 한국어로 넘어오면서 시간적, 공간적. 환경적 맥락에 따라 ‘밥’, ‘식사’, ‘진지’, ‘맘마’, ‘수라’(왕실에서 임금이 먹는 식사를 일컫는 말), ‘끼니’(아침, 점심, 저녁과 같이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 ‘공양’(사찰에서 밥을 일컫는 말), ‘메’(제사에 올리는 밥의 경우) 등으로 변주된다. 때로는 ‘아침 먹다’, ‘저녁 먹다’처럼 시간을 상징하는 명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번역가는 언어를 에워싼 상황 맥락을 잘 짚어내는 눈치가 필요하다. 분위기에 따라 언어 모드를 변환해 유연하게 풀어내야 한다.
중국에서 ‘식당(食堂)’이라는 단어는 학교나 회사, 기관 내에서 운영하는 구내 식당을 한정해 일컫는다. 반면 외식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반음식점의 경우 대개 ‘찬팅(餐厅)’이라고 부른다. 한번은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에서 공표한 규정 중 영양, 건강을 실천하는 음식점 구축을 위한 관련 지침의 한국어 번역을 의뢰받은 적이 있었는데, ‘食堂’에 적용하는 버전과 ‘餐厅’에 적용하는 버전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각 ‘구내 식당(혹은 사내 식당)’과 ‘일반 식당’이라고 옮겨도 의미 전달에 큰 무리는 없겠지만 대외적으로 공식 선포된 행정문서 임을 감안해 보다 사무적인 느낌을 주는 ‘급식업소’, ‘외식업소’라는 어휘를 선택했다. ‘법규, 규정’ 등 공문서 장르의 전형적 어휘 패턴과 공공성, 일관성이 중시되는 공적 맥락에 좀더 부합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어휘도 상황과 쓰임새에 맞는 외피를 걸쳐야 한다. 번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겉돌지 않고 잘 어우러지는 어휘를 문장 속에 들여앉혀야 독자들에게 거부감없이 닿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휘란 위치한 맥락과 함께 이웃한 단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늘 새겨두어야 한다. 기존에 알고 있는 의미 외에 또 다른 파생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 익숙한 어휘라도 한번 더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겸허하고 신중하게, 비판적이고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정 어휘가 어떤 사용역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판단이 서면 그 다음은 주변 언어 요소들과 잘 어울리면서 규범에 부합하는 도착어 어휘 퍼즐을 찾는 숙제가 남는다. TPO에 맞는 어휘를 선별해 적재적소에 끼워 넣는 어휘 센스가 빛을 내야 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