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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May 17. 2024

#1-6. 기분과 태도가 실리는 어휘


간혹 언론 매체에 등장하는 ‘귀머거리 정부’, ‘외눈박이 견해’, ‘절름발이 행정’과 같은 비유들을 접할 때면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워진다. 돌아보면 우리 일상에는 이처럼 편향적 시각의 어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꽤 오랜 시간 무심코 사용해왔지만 장애인이나 약자를 홀대하는 어긋한 정서나 여성 비하적 태도, 성 역할을 둘러싼 고정관념이 저변에 박혀 있었음을 깨닫고 아차 싶을 때가 많다. 최근 이러한 차별어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순화어들을 제안하는 목소리들도 커지고 있지만 무심코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개의치않고 툭툭 내뱉는다.     

    

번역 어휘를 고를 때 나는 기본적으로 차별어는 선택지에서 배제시키려고 노력한다. 어휘 선택권을 지니고 있는 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노골적으로 차별적이고 편파적인 어휘들을 굳이 쓰지 말자는 것이 나름의 소신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제안하는 순화 방안을 활용하거나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으로 대체한다.   

        



몇 해 전에 중국 작가의 프로필을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작품 소개 부분에 ‘处女作’라는 단어가 나왔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처녀작’이다. ‘처음 지었거나 발표한 작품’이라는 뜻이며, 심지어 같은 맥락에서 ‘처녀출전’, ‘처녀등반’, ‘처녀항해’ 류의 조합어도 있다. ‘처음 한 일이나 행동’을 지칭하는데 ‘처녀’라는 접두어를 내세우는 것에 대해 사회 일각에서 여성의 성적인 면을 비유로 활용한 전형적인 여성 차별어라는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그 결과 최근에는 공공기관이나 매체기관을 중심으로 ‘첫’, ‘최초’ 등과 같이 점차 순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나 역시 당시 ‘处女作’를 ‘첫 작품’이라는 단어로 옮겼던 기억이 있다. 그밖에 ‘데뷔작’이라는 중립적인 어휘를 쓰거나 대상이 작가라면 ‘첫 작품’, 배우라면 ‘첫 출연작’, 예술가라면 ‘첫 출품작’과 같이 세분화하는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딸아이가 초등 5학년을 다니던 무렵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중국 칭다오에 머문 적이 있었다. 등교 첫날 아이를 데려다주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중국 초등학교 인근의 아침 풍경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부모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어머니 몇 명이 아이들의 등굣길 안전을 위해 지도하는 모습도 데자뷰처럼 익숙했다. 그들이 입은 노란색 조끼 뒤에는 ‘家长护学队’라고 적혀 있었다. 학부모를 뜻하는 ‘家长’과 학생 보호 대원라는 의미의 ‘护学队(또는 护学岗)’가 합쳐진 말이다. 순간 ‘저건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라는 직업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머릿속으로 ‘녹색어머니회’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바로 지우고 ‘녹색학부모회’라는 단어로 교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색어머니회’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다(사실 요즘에도 여전히 쓰인다). 성역할 편견 이슈가 불거지기도 했고 실제로도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나 조부모 등 다른 가족 구성원이 봉사에 참여하기도 하기 때문에 ‘녹색학부모회’나 ‘녹색보호자회’로 바꿔 부르기를 권고하고 있다. 칭다오로 가기 전 딸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도 ‘녹색어머니회’라는 명칭이 학부모들의 요청에 의해 바뀐 적이 있었다.      


번역을 할 때는 이러한 언어 사용 변화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으며, 차별어들이 무심코 글에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나 영화, 드라마 등 서사성에 기반한 작품을 번역할 때는 캐릭터 구현, 대화나 사건 흐름의 구체화 등을 위해 어떤 대상에 대한 태도와 감정, 느낌을 왜곡없이 드러내야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겉모습을 보며 ‘외양’, ‘행색’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몰골’이나 ‘꼬락서니’라고 표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후자의 ‘몰골’, ‘꼬락서니’는 발화자의 불만, 혐오, 분노, 비난 등 부정적 감정을 어휘로 발산한 것이다. 


어휘 선택에는 특정 대상에 대한 발언자의 주관적 감정, 기분, 태도가 실리기 마련이다. ‘아’ 다르고 ‘어’ 다름의 이러한 차이가 스토리 전개나 인물 간 갈등 유발을 위한 원작자의 의도적 장치에서 비롯되었다면 번역에서도 최대한 결을 살리는 것이 맞다고 본다. 언어 순화 명목 하에 다양한 진폭의 목소리들을 표준화된 톤으로 획일화해 버리면 본래의 말맛이 빠져나간 무색무취의 번역문만 남지 않을까.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해외에도 소개된 바 있는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30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의 일상에 여전히 잔존하는 성차별적 요소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내뱉는 여성 차별적 발언들이 거침 없이 그대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점심 메뉴로 강된장을 고르자 상사가 ‘된장녀’냐며 비아냥거리고, 커피숍에서 유모차를 끌고 커피를 사려고 줄서 있는 주인공 뒤에서 남자들이 ‘맘충 팔자가 상팔자’라고 쑥덕댄다. 이쯤에서 번역가 입장에서 ‘된장녀’나 ‘맘충’ 등과 같은 차별어들이 외국어로 어떻게 옮겨졌을지 궁금해진다. ‘된장녀’나 ‘맘충’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대변하는 전형적 여성 혐오 혹은 비하 표현으로 타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고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단어들은 주인공이 마주한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주는 결정적인 어휘들이고, 번역 과정에서 강도를 중화해버리면 내용의 개연성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 번역가들도 대부분 한국식 표현법을 따랐다고 회고하고 있다. 중국어 번역본에서도 ‘된장녀’는 ‘大醬女’, ‘맘충’은 ‘媽蟲’와 같이 한국식 조어 방식을 그대로 노출하고 독자의 궁금증을 해결을 위해 역주로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번역가는 차별어를 순화해서 중립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순간과 작품 의도나 인물의 성격 묘사를 위해 차별어를 그대로 노출해야 하는 순간을 잘 구분해야 한다. 그렇기에 단어 하나라도 그 안에 실린 무게감과 날카로움을 헤아려 신중하게 다루고, 텍스트가 활용되는 상황과 목적에 맞게 변별적으로 강도를 조절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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